교리가 없는 감정 중심적인 신앙생활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입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교리가 없는 감정 중심적인 신앙생활은 결국 공허하고 비참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교리가 모습을 감춘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찬양(주로 CCM)도 열정적으로 부르고, 기도도 울부짖으면서 하는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교리가 없으니 감정에 불타오르는 정도로 신앙의 건전성을 헤아려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현대 신자들은 예배당에 불타오를 준비와 기대를 하면서 나옵니다. 무언가 이해하고 파악하기도 전에, 대강 분위기만 잡으면 이미 반쯤은 자신의 감정에 취해 있습니다. 그들은 감격해 눈물도 흘리며, 하나님의 은혜(?)에 흠뻑 빠져 말할 수 없이 행복한 표정도 짓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멀리 내다볼 것도 없이, 설교만 시작되어도 그 엄청난 은혜는 단잠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들의 삶은 불신자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리가 없는 감정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행태가 이와 같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런 현상을 세상의 공연장에서도 똑같이 엿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관객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보여줄 공연에 빠져들어 갈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공연장을 찾습니다. 감미로운 발라드풍의 노래가 나오면 마치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박자가 빠른 댄스 음악이나 곡조가 격렬한 록 음악이 나오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열광합니다. 이들도 이때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도 오래가지 못하며 허전함과 허무함에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이내 공연장을 다시 찾고 맙니다.
이렇듯, 교리가 없는 감정 중심의 교회는 결국 사람의 감정만 잔뜩 부풀려놓는다는 점에서 세상 공연장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감정이 폭발할 때는 천국 가장 높은 곳을 거닐다가, 이내 지옥 가장 밑바닥을 기어 다닙니다. 실제 삶은 전혀 변하지 않으며, 부풀어 오른 감정에 속아 진정 은혜를 받은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교회수련회나 찬양집회에 열심히 참여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준도 기초도 없는, 그저 자기 감정적 욕구충족에만 매달리게 하는 신앙생활이 과연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허무함과 회의감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교리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로, 그저 감정적 열심만 앞세운 결과가 이처럼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 역시도 이 문제의 중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무지한 그리스도인 중 하나였습니다. 20년 이상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제 신앙생활은 안정적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대부분이 이런 오류에 빠진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며, 그것이 오류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일은 뭐라고 더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비참합니다.
저는 바른 믿음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섭리 하심으로 개혁주의 책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종교개혁자와 청교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참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어, 참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져 갔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이 시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교리의 부재(不在)’라는 것입니다. 교리 부재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다음의 칼럼을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처럼 기독교에서 파생한 이단이 많은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이단은 한국에 다 모여 있다. 이것은 그저 웃고, 울고 불면서, 감동과 은혜만 있으면 된다는 이들의 잘못된 영적 취향이 만들어낸 사이비 신앙이다. 목회자들은 자기가 목양하는 교회에서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교리를 가르치면서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교리 없는 기독교가 결국 지금에 와서 무너지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는가?
저는 이 칼럼을 처음 봤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든 좋게만 포장하려는 교리 없는 교회를 향한 일침이었고, 교리 없는 상황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깨우쳐주는 글이었습니다. 이 칼럼은 교리를 배우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살아 숨쉬지 못하는 허수아비와 같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교리를 공부해야 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바른 교리를 통해 성경을 올바르게 배우는 일에 뿌리를 두기 때문입니다. 감상적인 신앙생활은 결코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꼴입니다.
교리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신앙생활의 지표입니다
교리를 강조하면, 사람들은 “성경만 읽으면 된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 말에는 아주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지 않으면, 결국 자기만의 틀에 갇혀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이 왜 생겨났겠습니까? 성경을 보기는 했으나, 자기만의 기준에 억지로 성경을 끼워 맞추며 읽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이 교리에 대해 강조한 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성경이 그 누구도, 아무것도 첨가할 수 없는 완전한 교리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안에 그의 지혜의 무한한 보화들을 보여 주시기로 의도하셨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학습하지 않은 자는 어느 정도의 지도와 안내를 받아야 할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바를 알고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확실한 길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언제나 성령께서 그를 부르시는 목표를 향하여 전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중략)……
이 책(기독교 강요)이 적어도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로 하여금 성경을 선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길을 열어 주는 열쇠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약속한다.”10
이처럼, 교리는 잠긴 문을 여는 열쇠와 같으며, 흐릿하고 부정확하게 보이던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안경과도 같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교회 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교리가 존재하지 않고, 분명한 정의(定義)가 없으며, 누구든 자기 좋은 대로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교리를 함께 고찰해 보는 일이 지금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한 때는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토대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하며,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모든 원수, 모든 교활한 원수, 우리의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오는 마귀가 사용하는 모든 계략을 알아야 합니다.”11
제가 신학대학교에 다닐 때, 한 학우와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학우는 하나님을 긍정의 하나님으로만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긍정적이기만 하신 분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처럼 긍정적이시라면, 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겠는가? 이처럼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자 그 학우는 돌연 제가 이단 같다고 답했습니다. 그런 반응에 저는 정말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신학생들조차도 성경보다는 자기 경험과 체험으로 형성된 자기만의 기준을 따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이는 참으로 전선(戰線)에 나간 군인이 자기 적과 임무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전선에서 북한군을 만나면, 우리 동포니 뭐니 하면서 얼싸안으려다가 총에 맞아 죽고 말 것입니다. 또, 인체를 잘 모르는 의사가 칼을 잡고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당신은 그에게 자기 몸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임에도, 유독 그리스도인만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훈련을 받는다는 신학생이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는 목회자조차도 자기 정체성과 임무를 잘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비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면서도 체계적인 교리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도 기독교를 잘 알지 못했다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보다는 내 경험과 감정과 생각을 신뢰했기에,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늘 불안하고 참된 기쁨이 없었으며, 하나님보다는 원수 마귀를 기쁘게 했다고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비참함을 알 때, 비로소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인식하고 인정해야, 하나님께 참으로 은혜를 구하며 달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교리를 몰랐을 때는, 이단을 만나더라도 그들이 왜 이단인지 몰라 그들을 그저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에서 포교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하나님의 교회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그들의 주장에 쩔쩔매면서 황급히 자리를 뜨기 일쑤였습니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조차도, 성경을 통해 설명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누군가 무엇을 알려주면,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을 보며 정말 신기해했습니다. 비록 방언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제가 잘못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해 세속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려고 그 열심을 본받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렇듯, 교리를 모르면 마귀의 계략에 보기 좋게 넘어가 허우적거릴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교리를 모르니, 성경을 읽어도 무언가 성경의 가르침과 진정 일치하는지 아닌지 가늠해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모르는 사람은 지도도 없이 여행하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도가 없으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경로로 따라 무엇을 타고 가야 하는지 몰라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지도가 있으면 지도에 목적지를 표시하고, 목적지까지 경로를 확인하면서 적당한 탈 것을 타고 평안하게 그리로 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뜻하신 올바른 길을 헤매지 않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1 장수민, 『존 칼빈(신학과 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