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단계 다음은 회심 (Conversion) 의 단계입니다.
진실로 중생한 사람은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이전에 중요하던 것이 이제는 별로 가치가 없어집니다. 바울이 빌릴보서 3:8 이하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마음> 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는 인생관 세계관이 모두 변해 버립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 변합니다. 오늘의 빈번한 교회 문제는 교회의 직분 받은 분들 중 이런 회심한 분들이 적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르심과, 중생, 회심의 단계를 거쳐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보아 주시는 단계인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칭의(稱義, justification) 라고 합니다. "칭의" 에 대해서는 참으로 오해가 많으므로 잘 공부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칭의"라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 뿐이며 우리가 실제로 흠도 없고 티도 없이 깨끗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칭의의 과정을 신학적으로는 법적인 선언 (forensic declaration)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죄인이로되 죄인을 죄인으로 다루지 않고,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죄없다” 고 인정해 주시며 따라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받은 사람이 ”이제 나는 의로워 졌으니 기도할 필요도 없고, 회개할 필요도 없고, 봉사할 필요도 없고, 나가서 아무렇게나 죄를 마음대로 짓자“ 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니 이런 사람들은 아직 구원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을 ”Antinomian” 즉 <도덕 폐기론자, 道德廢棄論者) 라고 합니다.
만일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오히려 나 같은 죄인 살려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 감격하여 더욱 겸손해 지고 더욱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9에는 ”하나님께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음이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거듭난 사람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상습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문법적으로 알 것은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란 말은 현재 동사이므로 헬라어에서는 현재 동사를 쓰면 <상습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어떤 일을 계속하는 일>을 말하므로, 상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상습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2:19에 보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마치 거듭난 사람처럼 착각하여 교회에 출석하다가 결국은 교회에 출석치 않고 믿음을 저버린 사람을 말하면서 ”원래부터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마치 중생한 자처럼 위장하고 있었다는 요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가롯 유다처럼,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의 교회에는 중생하지 못하고도 중생한 척하며 자기 자신을 속이며 하나님을 속이는 사이비 신자들로 인하여 온 교회가 고통을 당해 왔던 일을 교회사를 통해서 봅니다. 그러나 세칭 “구원파”에서 말하듯, 중생한 일자와 장소를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일자와 장소를 아는 것은 구원과 무관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중생하여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칭의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서 우리는 이중 전가 (二重轉嫁 double imputations) 를 봅니다. 즉, 그가 그의 택한 백성의 죄를 대신해 죽으셔서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 시켜서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고, 또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 시켜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외롭다고 보아주시는 하나님의 칭의 의 사상은 십자가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우리를 위한 화목제로 하나님에게 바친 바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