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가장 짧은 서신 가운데 하나인 요한삼서 1:7~8에는 오늘날 교회의 재정과 사역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종종 교회 재정 문제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인용된다. 어떤 이들은 이를 근거로 사역자는 사례비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반대로 교회가 사역자를 반드시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이 던지는 질문은 그 어느 쪽에도 머물러 있지 않다. 요한의 관심은 사례비의 유무가 아니라, 복음 사역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있다.
요한은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고, 분명히 “이방인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평가하거나 오해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유랑 철학자와 종교 장사꾼들이 넘쳐났고, 말과 지혜와 신앙은 대가를 요구하는 상품처럼 유통되었다. 복음 역시 그런 범주로 오해받을 위험이 있었다. 요한이 말하는 선교자들이 이방인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았던 이유는 복음이 거래나 보상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금욕적 선택이 아니라, 복음의 자유와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윤리적 결단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곧바로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앞선 문장을 보완하며 오해를 차단한다. 선교자들은 혼자 버티도록 방치되지 않았다. 그들은 굶주림으로 자신의 순수성을 증명하지 않았다. 대신 교회가 그들을 영접했고, 그 순간 교회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 곧 동역자가 되었다. 성경의 논리는 분명하다. 복음의 비용은 세상이 아니라, 복음 안에 있는 교회 공동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늘의 교회는 질문한다. 자비량이 더 성경적인가, 아니면 사례비를 받는 것이 정당한가. 그러나 성경은 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이 사역은 지금 누구의 책임 아래 놓여 있는가.
자비량은 복음이 오해받지 않도록 사역자가 스스로 비용을 감당하는 선택일 수 있다. 사례비는 복음 사역의 무게를 교회가 함께 짊어지겠다는 고백일 수 있다. 문제는 방식이 아니라 관계다. 자비량이라 해도 공동체와 단절된다면 건강하지 않고, 사례비를 받는다 해도 복음이 거래처럼 보이기 시작한다면 이미 길을 잃은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사례비를 말할 때 그것은 급여나 보상의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례비는 “이 사역은 당신 혼자의 소명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라는 공동체적 약속이다. 이 약속이 사라질 때 사역자는 눈치를 보게 되고, 교회는 소비자의 위치로 이동하며, 복음은 점점 관리의 대상이 된다.
요한삼서가 우리에게 균형을 남긴다. 복음은 돈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부정함으로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복음은 공동체가 함께 짊어질 때 가장 잘 전파된다. 이런 논의 안에서, 교회는 사역자를 “고용”하지 않고, 사역자는 교회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같은 복음을 위해 같은 무게를 나누어 지는 동역자이며, 요한은 그 단순하지만 어려운 길을 “마땅하다”고 부른다.
기고: 송준기 목사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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