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들은 “시들어 가는 나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경건에 관한 좋은 책을 추천해 주기를 원하는 슬픈 눈의 성도들을 만난다.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은 무미건조해지고 무익하게 되어 왔다. 가끔 그런 요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궁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새로운 비법, 하나님과 그 어린양과의 즐거운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간단한 방책이나 손쉬운 수단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런 서적이나 방책은 없다. 당신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 당신은 자아를 겨냥하라. 자아를 죽이는 일에 시선을 고정하라! 자아를 부인하라! 금식하라! 일찍 일어나라! 주님을 알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에너지를 새롭게 모아가지고 부르짖으라. 그러면 내일은 어떠한가? 거기에도 역시 십자가는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자아에 고통을 가하지 않기로 작정한다면 당신은 다시 싸늘한 상태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후퇴할 것이다.
어떤 불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기를 중지해 왔다. 어쩌면 당신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당신에게 보여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는 자신을 당신에게 알리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은밀한 처소의 입구에는 십자가가 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로 들어 오려면 당신은 자아를 서서히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내어 던져야 한다.
십자가의 긴 그늘은 당신의 가정으로부터 주님을 위한 당신의 봉사 영역까지 당신을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증거하는 일에는 무서운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당신이 당신의 일터에 도착하면 동료 일군들이 안쪽 구석에 모여서 어깨를 툭툭 치면서 낄낄 거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자신이 거기에 용감하게 가담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훌륭한 유우머의 주제라는 것이 고작해야 추잡한 이야기뿐이다.
하루 중에 심각한 견해가 토론될 때에는 죄와 의, 혹은 삶의 목적과 같은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제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매번 당신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당신의 견해와 함께 배척당하는 것을 보아왔다. 진리를 증거할 때마다 당신은 더욱 환영을 받지 못한다. 당신은 오늘날 진리에 대하여 담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예민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애정을 받으며, 그들에게 받아드려지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화평하게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의 동료들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 우리의 바램이다. 어떤 맹목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가지고 증거한다.
이런 태도는 은혜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냉담한 반응을 얻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 주면 공손한 감각이 고양되며 친절과 온화함을 갈망하는 마음이 증대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과 함께 그 토론에서는 주님의 영광이 관심사이다. 인간의 영혼의 영원한 복지는 진리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달려 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증거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면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그 자신의 사회적 의식과 화평을 사랑하는 태도에 대하여 고통을 줄 수 있는 말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그는 고의적으로 자기와 동료 일군들 사이에 쐐기를 더 깊이 박아야 한다. 증거를 위한 손쉬운 방법은 없다. 고통이 없고, 난관이 없는 방법은 없다. 당신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더러운 죄인들이며 은혜를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피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은 거슬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달콤하게 치장할 수는 없다.
한 젊은 여인이 그의 어머니에게 복음 설명할 때에, 그녀는 싸늘한 반응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진리가 어떤 방법으로 제시되더라도 그 속에는 어머니의 일생에 걸친 잘못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딸에 의하여 그녀의 종교, 그녀의 견해, 그녀의 삶의 스타일 전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말씀의 검이 어머니의 마음을 쪼갤 때, 예민한 딸도 동시에 자기 자신의 육신을 긴 못으로 찌르기로 결심했다.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하나의 가슴만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마음이 모두 찢기워야 한다.
예배와 전도 위에 십자가의 그늘이 드리워짐에 따라서, 그 그늘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봉사 위에도 드리워진다. “당신은 주일학교를 가르치겠습니까?"와 같은 질문은 “사무실에서의 격양된 하루 뒤에 따라오는 평온하고 즐거운 저녁시간을 당신은 포기하시겠습니까? 그 학급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 연구를 위하여 여가를 희생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학생들을 위한 기도에 그나마도 부족한 당신의 시간을 할애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된다.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맡은 각각의 의무는 다른 곳에서의 제한을 부과한다.
십자가의 형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가 우리 앞에 매일의 십자가를 가져다 놓으실 때에 과장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