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선 목사의 생애와 신앙인격
강용원 (고신대학교 교수 기독교교육학)
Ⅰ. 서론
주남선 목사(1888-1951)에 대한 자료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심군식 목사가 집필한 주남선 목사의 전기인 ‘해와 같이 빛나리’인데, 이 자료 외에는 의외로 그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필자는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필자 자신도 그 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제한된 자료이지만 그에 관한 자료들을 접하면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과 의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글은 제한된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곳에 나타난 주남선 목사에 대한 느낌과 인상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 것이다.
Ⅱ. 생애
주남선 목사는 1888년 9월 14일 거창에서 한학자 주회현의 3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17세까지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그 후에는 그 지방 군수의 비서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1911년 9월에는 3개월간의 잠업실습소를 수료하고, 누에 사육의 일을 하게 된다.
그가 기독교와 접하게 된 것은 1908년, 그러니까 그가 스무살 때였다. 그는 시장에서 전도하는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받게 되었고, 기독교에 입신하였으며, 1911년 12월에는 호주 선교가 맹호은으로부터 학습을, 그리고 다음해 6월에는 같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그는 1914년 4월에는 거창읍 교회의 서리집사에 임명되었으며, 1919년 2월 28일에는 동 교회의 장로로 장립하게 된다. 그는 1914년 5월 10일에 남술남 사모와 결혼을 하였으며, 슬하에 4남 2녀를 두게 된다. 그는 복음을 더 잘 공부하고, 효과적으로 교회에 봉사하기 위하여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가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또 장로가 된 1919년 3․1 독립운동이 발발한 해였다. 거창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20일에 일어났는데, 그는 오형선, 고운서 등과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해 8월에는 국권회복운동에서 관여하였다.
그 후 주남선은 독립군 자금지원과 의용병 모집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 후 주남선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게 되는데, 이 어간의 그의 구금과 옥고, 그리고 신학교 입학 연대 산출에서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들을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이상규, 8).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거창읍 교회의 전도사와 권서인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가을에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다음 해인 1931년부터는 거창읍 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1938년 12월에는 거창읍 교회의 위임목사직에서 강제 해임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여러 차례 경찰의 호출을 당했고, 1940년 7월에는 일제 검거에서 체포되어 해방이 된 이틀째인 1945년 8월 17일까지 진주, 부산, 평양 등에서 영어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 주남선 목사는 다시 거창읍 교회에서 시무를 시작하였으며, 경남노회의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고, 특히 그는 고려신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이사장으로, 또한 고려고등성경학교의 설립이사로 활동하였고, 거창성경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의 일을 맡기도 하였다. 주남선 목사는 6․25가 발발한 다음해인 1951년 3월 23일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