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
그는 6․25가 발발하였을 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돌보았다.(심군식, 207ff). 그는 적들의 총부리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고, 교우들을 독려하면서 예배를 계속하였다.
박손혁 목사는 주남선 목사의 장례식에서 행한 약력소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다. “1950년 6월 25일 사변 발생되자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드린 후 피난을 단념하시고 동역자들을 역방(歷訪)하시면서 교회와 양떼를 사수하기를 권장하시고, 폭탄과 총탄이 비오듯하는 때라도 아직도 남아 있는 교인이 있지나 않나 하여 집집이 찾아다니셨고, 8월 29일 함양지방으로 순회하시든 중, 개평교회서 복음진리를 힘서 증거하시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 구금을 당하셨다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놓임을 받으시고․․․”(박손혁, 35) 이와 같이 주남선 목사는 한마디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주남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대 운동에 앞장서므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것 역시 그가 그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 죽음을 주관하시는 천지를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그가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다는 하나의 예는 평양형무소에 있었을 때의 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1941년 11월 10일부터 그의 머리 뒤에 부스럼이 생기더니 점점 더 험해갔다. 부스럼은 목 뒤 급소에 생겨 목을 움직일 수 없이 통증을 가져오게 되었다. 발치대종이었다.
의사가 와서 치료를 하였는데, 수술을 해서는 안되는 종기에 칼을 댔기 때문에 더욱 악화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를 치료한 의사는 주목사에게 병보석으로 나갈 것을 권했으나 주목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죽기로 각오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목뒤의 종기로 너무 괴로워 견딜 수 없게 되자 의사는 다시 간곡히 병보석으로 나갈 것을 권했지만 주 목사는 반대하였다. 그가 꿈에라도 바라는 것은 순교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어려움과 아픔 가운데서도 12월 2일에는 법정에 출두하는 검사출정명령을 받게 된 것이다(심군식, 185F). 한마디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죽을 것을 각오한 사람이었다.
2. 명예를 앞세우지 않은 사람
죽음을 초월해서 산 주남선 목사는 인간이 주는 영광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가 국가를 위해서 행한 애국적인 일들은 표창 받아서 마땅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정부는 3․1절을 기념하여 주남선 목사에게 애국표창을 하겠다고 제안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위하는 일은 국민의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의 전기에서는 꼭 식장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목사가 갈 곳이 못됩니다.”(심군식, 271)
이와 같이 주남선 목사는 자신이 받는 영광에서 관심이 없었다. 개인적인 명예나 복지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된 후 초대 국회의원을 선거하는 과정에서도 주 목사의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국회의원의 출마를 종용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표현태씨를 대신 추천함으로써 그 분의 후광으로 표현태씨가 무투표 당선되기도 하였다. 만일 주남선 목사가 명예나 물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들 그다지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조금이라도 자신의 명예와 영달에 관심이 있었다면 처자를 버려두고 7년간 옥중 생활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남영환, 38)
그는 개인의 영광에니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반면에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전성도 목사는 주남선 목사에 대해서 술회하면서 “주 목사님은 교회와 교단을 생각하는 마음이 뜨거운 분이었다.”(전성도, 37)고 묘사하고 있다.
그 당시의 불편한 교통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나 기타 교단일이 있게 되면 거창에서부터 가능한한 참석하였고 애쓰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자기 교회만 그런대로 되면, 상회 일이나 공동의 일에는 무관심한 교역자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면에서도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주남선 목사는 해방 후에 경남노회의 노회장, 고려신학교의 초대 이사장 등의 직분을 맡았으나, 그는 이 일을 명예나 영광으로 알기보다는 하나님과 교단을 섬기는 한 방편으로 받아들였음에 틀림이 없다. 오 병세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주 목사님은 자신을 나타낸다거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선전효과와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너무나 자기 선전에 급급하는 이 시대에 주목사님 같은 분이 사모가 된다. 그는 실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분이었다.”(심군식, 8)
여기에 덧붙여 주남선 목사는 후배를 아끼는 마음, 신앙의 동료, 형제, 교인에 대한 깊은 배려와 사랑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남영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1951년 건강이 돌이킬 수 없이 쇠약하였을 때, 이 사람의 목사안수를 위해 눈보라가 치는 밤에 장작을 실은 트럭을 타고 부산까지 오셨다. 그 분이 종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시고 별세하시기까지 고통가운데서도 한국교회와 신학교와 거창교회를 염려하셨다.”(남영환, 39)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