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칼빈주의 신앙 체계 중 이 네 번째 교리 역시 앞서 살핀 세 가지 항목의 논리적 결과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한 본성 때문에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려 하셨고, 그리스도가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위해 성취해 놓으신 그 구원의 은총에로 그들을 부르실 수단을 강구해 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 체계는 논리적으로 완전하긴 하나 단순한 논리 체계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확고히 선 순전히 성경적인 신앙 체계이다.
그런고로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교리는 도르트 회의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작성한 사람들이 궁리해 낸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계시인 것이다.
예컨대 로마서 8장 30절을 들 수 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남녀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쁘게 선택한 그들을 부르셨던 것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란 무슨 뜻인가?
교회에서, 옥외에서,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복음의 부르심을 받을 때, 모든 사람이 다 그 부르심에 유의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부르심에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즉 외적인 부르심이 있고, 내적인 부르심이 있다는 말이다.
외적인 부르심은 "전도자의 말씀"으로 기술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부르심은 여러 가지 다른 심령에게서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여 여러 가지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이 죄인의 영혼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외적인 부르심에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인 부르심이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시는"이가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남자나, 여자나, 젊은이를 그의 은혜로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것은 꺾일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표시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속에서 거듭거듭 입증되고 있는 예를 다음의 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그에게 "올" 자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선택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에게 올 때는 "내어 쫓김"을 당하지 아니 할 것이다.
2.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6:44)
여기서 우리 주님은 사람이 저들 스스로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고 간단히 말씀하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한다.
3.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인간은 외적인 부르심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응답하여 올 자는 아버지께 배운 사람들이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
6.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7.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벧전5:10)
이 불가항력적 은혜 또는 효과적인 부르심의 교리를 설명해 주는 뛰어난 예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한 강변에서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때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다. 전도자 바울이 루디아의 귀에 전한 것은 외적인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에 하신 말씀은 불가항력적 은혜의 내적인 부르심이었던 것이다.
알미니안 파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의 부르심을 거역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거역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불가항력적 은혜와 같은 그런 교리는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을 거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역하며 또 본질상 거역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런고로 불가항력적 은혜와 같은 교리는 마땅히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본성보다 더 큰-우리의 거역보다 더 큰- 어떤 영향력이 우리의 영혼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역사하는 큰 힘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인간의 의지
2. 마귀의 의지
3. 하나님의 의지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승리하게 될까?
만일 우리의 구원 문제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지 못한다면 마귀의 의지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 마귀는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17세기의 퓨리탄인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의 전차를 타고 정복하신다… 그는 마음의 교만을 꺾으시고, 왕성으로서 그에게 저항하던 의지를 일으켜서 그의 은혜에 굴복하게 하신다. 그는 돌 같이 굳은 마음이 피를 흘리게 하신다. 아, 얼마나 강력한 부르심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도덕적 설득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즉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심시킬 때 도덕적으로만 설득하고 다른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때 마귀가 그들을 멸망시킬 때에 하는 것만큼 많은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신 것이다.
누구의 의지가 승리할 것인가? 우리의 의지? 그러면 그것은 과연 왕성으로서 주님께 저항하지 않는가?
"…너희는 생명을 얻으려고 내게 오려하지 않는다"
그러면 마귀의 의지인가? 그렇다면 그의 의지는 항상 우리의 의지보다 강할 것이 틀림없는데 도데체 누가 구원받을까?
그러나 이것이 복음이니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가 나타나서 그의 복음의 전차를 타고 이기고 또 이길 것이다.
아니, 그는 정말로 승리하신다! 그는 사탄을 이기고 또한 하잘 것 없는 인간을 이기셔서 그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찬송케 하시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