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설교자가 힘써야 할 세 가지
기독교 강요에서 볼 수 있듯이, 칼빈의 신학은 교훈적이며 고백적이며 변증적이었다. 교훈적이라 함은 성경의 진리가 그 속에 녹아있음이요, 고백적이라 함은 그것이 성경의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새기는 성령의 감동의 기록이라는 점이요, 변증적이라 함은 참 신학에 대한 진정한 항변이 그 속에 채워져 있음이다. 칼빈은 올바른 설교는 이러한 세 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는 종합 예술과 같아야 한다고 여겼다. 설교를 통하여 진리를 가르쳐야 하며, 그 진리에 대한 고백과 그 진리에 따른 삶에 이르는 감화가 있어야 하며, 진위정사(眞僞正邪)를 올바로 분별하여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자리에 서게 해야 한다.
칼빈을 통하여 우리는 설교자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첫째, 설교자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한다. 유일하신 교사이시며 원(原) 선포자시며 전파자이신(마 4:23)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 그 들은 것을 선포해야 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먼저 들어야 입이 열린다. “귀가 열리고” 난 후에야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진다(막 7:35). 올바로 들어야 올바로 전할 수 있다.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선포할 수 있다(벧전 4:11).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의 학교,성령의 학교,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먼저 배워야 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그 말씀에 감동되어야 한다. 칼빈은 디모데후서 3:16을 설교하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저는 성경을 설명할 때마다 항상 다음을 저의 원칙으로 삼습니다. 저의 말씀을 듣는 사람마다 제가 제시한 가르침으로 유익을 얻고 구원에 이르는 덕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그러한 감동을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저는 저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위하여 덕을 세우는데 실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한 불경스러운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가르쳐야 한다. 배우지 않는 자는 가르칠 수 없다. 전하고자 하는 자는 많으나 배우고자 하는 자는 적다. 배움의 즐거움을 모르는 자는 배움의 즐거움을 가르쳐줄 수 없다. 칼빈은 욥기를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강단에 오를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몸을 도사리고 강단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여러분과 함께 제 자신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에게 저주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 설교자는 설교를 작성하고 전하는 전 과정에 있어서 기도해야 한다. 설교자의 설교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삶 속에 생명의 양식과 생수로 임하게 된다.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들을 설교자들로 사용하심으로써 성도들에게 겸손의 도를 배우게 하신다. 설교는 설교자의 자질이나 수준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따라서 내적인 감화를 일으킨다. 설교는 설교자의 주관적 사변이나 체험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말씀의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동일한 진리가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서 유기적으로 영감되어 기록되었듯이, 동일한 진리가 다양한 설교자들에 의해서 선포되어 성도들에게 유기적으로 감화된다. 그리하여 말씀의 진리가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이 내려 심령을 적시게 된다. 설교자가 기도하지 않고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고는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히 4:12)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깊이 새겨지는 말씀을 전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말씀은 지극한 능력으로 역사하여 선택된 사람들이 자기 지식으로부터 깨어져서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은혜 속으로 도망치게 한다. 말씀이 그들의 심령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