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사이트는 [회원가입]을 하신 후에 내용들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회원가입 후, 하루 정도 기다리시면 정식회원으로 등록해 드리며 모든 내용을 다 보실 수 있습니다. 

사역의 특성상, 불가피한 절차임을 이해 바랍니다. 

자세한 사항은 drcharleshong@gmail.com 으로 문의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Shalom aleikhem !

שָׁלוֹם עֲלֵיכֶם


 auto
 
작성일 : 21-07-28 18:50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5)
인쇄
 글쓴이 : gopeace
조회 : 1,163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개념은 자존체(自存體, subsistent being)라는 신학적 표현이다. 

 

토랜스(T.R. Torrance)에 따르면 그레고리 나지안주스(Gregory of Nazianzus)는 다른 두 갑바도기아 교부들 곧 바실과 그레고리 닛사와는 달리 어떤 의미에서이든지 존재양식 혹은 존재화의 방식을 의미하는 τρόπος ὺπάρξεως 를 하나님의 위격(hypostasis)을 설명하는 데 연결 짓기를 원치 않았다. 즉 그레고리 나지안주스는 존재양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τρόποι ὺπάρξεως 는 하나님의 위격을 설명하는데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대신하는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제안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위격적으로 자존하는 관계자들(relations eternally and hypostatically subsisting in God)로서의 삼위 하나님의 이해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한낱 존재양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내재적으로 자존하는 실체로서의 관계들(substantial relations subsisting intrinsically in the eternal Being of God)"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토랜스는 삼위 하나님 사이에서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한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생각의 특징은 그 관계적 자존체(relational subsistent being)가,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어떤 것들처럼, 실체적(substantial)임을 밝혀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서방신학의 전통 안에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견해와 같은 맥락에서, "자존체들(subsistent beings)" 혹은 "자존적 관계체들(subsistent relations)"로 이해되어 왔다. 한손(R.P.C. Hanson)에 따르면, 예를 들어, 어거스틴(Augustine)은,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한다고 할 때, 셋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상 범위 안에서의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길이 없음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이후, 하나님의 위격은 "실재적이며, 자존적인 관계체(real, subsistent relations)" 혹은 "하나님 안에 자존하는 실재적인 관계체(real relations which are subsistent in the divine Being)"이라는 답을 주었다. 

 

켈리 또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각각의 위격 하나님이 다른 위격의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존재하신 다는 점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각각 하나의 "관계"로 이해되며, 그 관계는 실재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이해됨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의 위격은) 어떤 것과의 관계성 안에 있다. 마치 아버지가 그렇고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성 안에 있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관계성은 우유적(偶有的, accidental)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항상 아버지이시며, 후자는 항상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들이 항상 아들이라 할 때, 그 항상은 아들이 태어나신 때로부터 (마치 태어나신 어느 때가 있는 것처럼)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들이 아들이시기를 그치신 적이 없듯이, 아버지가 아버지이시기를 그치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아들은 항상 태어나신 자이시며 아들이시기를 시작하신 때가 따로 있으신 것이 아니다. 

 

유라이(M.W. Ury)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이해가 갑바도시안 교부들과 실질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세 위격의 상호 관계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하여야 할 정도로 관계적 개념으로서의 세 위격의 이해를 어거스틴이 강조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유라이는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세 위격의 관계는 "위격에 대해 부수적(ancillary)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substantial)"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이해를 이어 받아,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위격을 "자존하는 관계체(subsistent relations)"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에 있어서 초대교부들과 구별이 되는 특징을 보인다. 하나님에게 있어서의 구별이란 오직 (삼위의) 기원의 관계를 통하여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관계는 어떤 한 주체에게 있는 하나의 우유적인 (accidental) 것이 아니며, 신적 본질(the divine nature) 자체이다. 그러므로 관계란 마치 신적 본질이 그러하듯이 자존적(subsisting)이다. 결과적으로, 마치 신격(Godhead)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버지되심(fatherhood)이 하나의 위격이신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위격'이란 자존하는(subsisting) 것으로서의 관계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위격'이란 본질 (substance)로서의 관계이며, 신적 본질 안에서 자존하는 것이란 다름 아닌 신적 본질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이 본질은 곧 신적 본질 안에 자존하고 있는 (subsisting) 위격(hypostasis)인 것이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위격을 관계적 자존체로 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위격, 관계, 본질(nature or essence)등이 모두 하나님의 단순 단일성(divine simplicity)으로 인하여 동일한 실재임을 주장하였다. 아퀴나스에게있어서 하나님의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과 오직 개념적으로만(conceptually) 다를 뿐, 실재적(really)으로는 동일하니, 하나님의 위격은 존재론적 실재(the ontological reality)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한 하나이다. 아울러, 세 위격을 구별하는 개별 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앞서 살펴보았던 존재양식 혹은 존재화의 방식( ) 또한 아퀴나스에게 있어서는 위격(hypostasis)과 개념적으로만 다를 뿐이다. 

 

결국,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으로부터 "관계적 자존체(relational subsistent being)"으로서의 하나님의 위격을 이어 받으면서, 또 다른 한편 어거스틴에게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던 하나님의 단일단순성(divine simplicity)을 삼위의 개념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위격이 실재로는(really) 본질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위격의 존재론적 의미를 본질로 설명하였다. 

 

(계속)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7,994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5244 나의 소망 예수 (1) gopeace 08-05 1452
5243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8/5/21) 창암 08-04 1546
5242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10) gopeace 08-03 1689
5241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8/4/21) 창암 08-03 1627
524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8/3/21) 창암 08-02 903
5239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9) gopeace 08-02 1383
523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8/2/21) 창암 08-01 1051
5237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8) gopeace 08-01 1624
523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31/21) 창암 07-30 1468
5235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7) gopeace 07-30 1221
523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30/21) 창암 07-30 1331
5233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6) gopeace 07-29 1241
523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29/21) 창암 07-28 1067
5231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5) gopeace 07-28 1164
5230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4) gopeace 07-27 1593
5229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28/21) 창암 07-27 1155
522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27/21) 창암 07-26 1254
5227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3) gopeace 07-26 1365
522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26/21) 창암 07-25 1230
5225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2) gopeace 07-25 1647
522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24/21) 창암 07-23 1844
5223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1) gopeace 07-23 1375
5222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15) gopeace 07-22 1390
5221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23/21) 창암 07-22 1139
522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22/21) 창암 07-21 1203
5219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14) gopeace 07-21 1530
521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21/21) 창암 07-20 1567
5217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13) gopeace 07-20 1354
521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20/21) 창암 07-19 1118
5215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12) gopeace 07-19 1855
521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19/21) 창암 07-18 1049
5213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11) gopeace 07-18 1711
521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17/21) 창암 07-16 1154
5211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10) gopeace 07-16 1325
5210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9) gopeace 07-15 1534
5209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16/21) 창암 07-15 1456
520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15/21) gopeace 07-15 1132
5207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8) gopeace 07-15 1559
520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14/21) 창암 07-13 1710
5205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7) gopeace 07-13 1202
520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13/21) 창암 07-12 1313
5203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6) gopeace 07-12 1569
520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12/21) 창암 07-11 974
5201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5) gopeace 07-11 1750
5200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4) gopeace 07-09 1622
5199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10/21) 창암 07-09 1186
519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9/21) 창암 07-08 1098
5197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3) gopeace 07-08 1675
5196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2) gopeace 07-07 1753
5195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8/21) 창암 07-07 1218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