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그 본질이 완전하시므로, 어떤 것이라도 완전한 것은 하나님께로 귀속이 되는 바, '인 격'이란 말이 하나님께 사용이 되는 것은 적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피 조물에게 쓰이는 바와 똑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쓰여서는 안 되며, 더욱 높은 의 미에서 쓰여야 한다. 마치 하나님을 일컫는 다른 경우들에서 논의할 때 설명하였듯 이, 우리가 피조물을 일컫는 다른 것들도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유비적 용례에 따라 하나님, 사람, 그리고 천사들에게 "인격 혹은 위격"이란 말이 공통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이때의 "인격 혹은 위격"은 "이성의 본질 안에 있는 자존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위격에 심리적이며 도덕적인 이해를 부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는 유비적 이해라는 범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 각각을 이성, 사랑, 정의, 자유,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어떠한 것이든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주체(supposit, subject)로 이해하고 있다.
벨레키(Velecky)는 이러한 아퀴나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준다. 사람과 하나님 모두에게 적용되는 정의가 주어질 때에, 그것의 의미는 유비적이다 ... '인격'은 행동과 책임의 궁극적 주체를 가리킨다. 그것은 (행동과 책임이) 최종적으로 귀속되는 주체이다. 그런 까닭에 삼위일체 신학은 '인격'의 개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격은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재창조하시는 행위자들(agents)이시기 때문이다. 각각의 위격은, 비록 다른 두 위격들과 함께 행하시지만, 정확히 '인격'으로서 행동하신다. 그리고 피조된 전 우주는 그들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이상의 관찰은 비록 아퀴나스가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 안에 오직 한 실재만 있을 뿐이므로, 하나님의 위격이 하나님의 본질의 주체(subject)로 구별되어질 수 없으나, 유비적으로는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하나님의 본질의 주체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비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위격들은 본질의 속성에 속한 모든 것들, 이성, 사랑, 공의와 자유를 지닌, 의식과 행위의 주체인 것이다. 요컨데, 아퀴나스를 통해 본 서방신학은 유비적인 용례라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위격을 심리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다른 한편, 동방신학의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본질의 존재론적 기체(基體, supposit)이며 또한 행위와 의식의 심리적 인격체(psychological person of action and consciousness)인 것으로 관찰이 된다.
예를 들어, 메이엔도르프(John Meyendorff)는 이와 관련한 팔라마스(Gregory Palamas)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팔라마스는 하나님의 위격들을 단지 본질과 동일한 위격의 특성들이나 내적 관계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존재(divine Being)에 대한 '기체들 (基體들, supports)'로 본다는 점에서 위대한 갑바도시안 교부들의 전통 안에 있다 ... 만일 위격들이 한낱 본질의 현현에 불과하다면, 아들과 성령은 위격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질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아버지 하나님만이 유일한 위격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의 능력이라고 말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가 (아들 하나님)가 '스스로 위격화 된 지혜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의미에서 그는 지혜가 아니며 아버지와 성 령과 동일한 지혜와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 존재의 활동이며 작용인 것이다.
다시 말해, 팔라마스에게 있어서는, 앞서 살펴 본 아퀴나스의 견해와는 달리, 하나님의 위격들은 하나님의 본질과 다만 개념적으로만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기체들로서 존재론적으로 구별이 되며, 심리적 혹은 도덕적 의미에서 "인격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격들은 지혜와 능력은 물론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속성들 모두를 소유하고 있는 "기체들(supports, 또는 supposits)"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지울라스(Zizioulas)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개별적인 위격들을 "총체적인 본질의 담지체들(擔持體들, bearers of the totality of nature)"로 이해함으로써, 아퀴나스의 견해와는 달리, 위격을 본질의 존재론적 기체로 보는 동방신학의 특성을 증거한다. 지지울라스는 이러한 이해의 정당성을 한 기독론 논쟁으로부터 풀이한다. 칼케돈(공의회)는 ... 그리스도의 위격적 정체성이 아들 (하나님)의 위격임을 천명함으로써 중요한 존재론적 서술을 하였다 ...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의 답은 아들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 분에게 있어서는 두 품성들이 각각의 특성을 위격에 부여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위격이 존재론적 의미에서 이 특성들에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는 것은 아니며 ... 그러므로 두 품성들이 개별자인 '나'를 존재론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의 특성들이 위격과 상관없는 것은 아니나 ... (오히려) 이러한 특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위격에 의존한다. 위격이 자신의 존재를 본질의 특성들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원인은 일반자(곧, 본질)가 아니라 개별자(곧 위격들)에 있는 것이다.
지지울라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씨릴(Cyril of Alexandria)의 "두 품성의 위격 연합(the hypostatic union of the two natures)이라는 개념은 위격이란 본질의 기체(supposit) 혹은 담지체(bearer)로서 본질과 구별되는 존재론적 실재임을 주장하는 신학적 기반을 제공하여 준다고 생각한다.
위격이 본질과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실재라는 이해는 하나님의 위격들이 본질의 존재론적 필연성에 속박을 받지 않으며, 절대적 자유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여 준다고 지지울라스는 힘주어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아버지 하나님은 자유의 존재자로서 본질의 필연에 의해 강요받지 않으시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가운데, 아들을 "낳으시고" 성령을 "발출하신"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 행사는 결과적으로 "교통(communion)"의 사랑을 생성케 된다. 다시 말해서,존재론적인 방식에 따라, 하나님의 자유의 행사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결과를 낳는다.따라서 지지울라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위격은 존재론적으로 자유와 사랑 가운데 존재하며,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존재"는 "의식과 행위의 심리적, 도덕적 주체"로 이해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