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성례들의 이해를 통한 칼빈의 언약의 집합적 특성
마지막으로 나는 세대주의자들이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그리고 언약신학의 입장에서 다르게 보는 성례들에 대한 몇 가지 관찰들을 제공하려고 한다. 이 방대한 토픽은 성찬, 세례 그리고 유아세례 관점에서 성례들의 특성, 의미 그리고 실행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간단히 언급하기 위하여 언약 신학은 성례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세대주의는 성례들을 좀더 개인적인 의미로 경향이 있다는 주목하자.
세대주의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은 세상을 점점 험악해져 갈 것이라는 신념과 병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바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 개인이 천국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개인적 구원의 즐거운 소망을 축소시킴이 없이, 언약신학은 여호수아와 함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길 것이다"고 단언한다.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의 집합적 특성을 인식하고 있다. 구약으로부터 세대사이에 표현된 언약공식, "나는 너희의 하나님과 너희 이후 너희 자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의 천대에 이르기까지." 이 구약 약속들이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는 것에 근거하여 칼빈과 언약신학은 특별히 유아세례에 표현된 대로 언약의 집합적 특성을 단언하였다.
칼빈은 유대인들과 함께 언약이 새 언약 시대에로 계속된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다고 역설한다. 칼빈에게 있어 그러한 부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넓히는 것보다 좁히는 것을 내포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직도 진리의 분명한 지식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참으로 언약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은 오늘날에도 옛날에 유대 백성에게 못하지 않게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이 사역은 그 때에 유대인들에게 연관되었던 것과 못하지 않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연관되어 있다. 아마 우리가 그의 오심에 의하여 그리스도 아버지의 은혜를 경감하거나 삭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러나 이것은 저주받을 신성모독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자녀들 역시 그들이 그의 언약의 상속자들로 되어 있고 그리고 경건치 못한 자들의 자녀들로부터 구별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씨라고 불려졌다. 동일한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도 거룩하다고 고려되어 진다 그리고 비록 한편만 믿는 부모에게서 출생하였다할지라도, 사도의 증거에 의하여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의 불결한 씨와 다르다. 이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직 후 외적 성례에 의하여 유아들에게도 검인하라고 명령하셨음으로,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증거하지 않고 검인하지 않는 무슨 핑계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구약의 자녀나 신약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동일한 언약적 약속에 의하여 거룩한 씨이다. 따라서 유아세례는 할례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 칼빈은 구약의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새언약 시대의 믿는 자들을 단지 예시한다는 핑계를 받아드리지 않는다. 이것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은 기독교인 믿는 자와 그들의 자녀들 역시 포함하기 때문이다. "자녀"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 그들은 이 차이점이 발견 한다: 그의 씨로부터 그들의 기원을 갖는 자들은 구약 하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의 믿음으로 시작하는 자들은 그의 이름에 의해 불러진다. 그들은 그러므로 할례를 통하여 언약의 교제로 접목되어진 육체적으로 유아는 신약의 영적 유아를 예시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죽지 않은 생명으로 중생되어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희미한 불꽃튀김을 본다. 그러나 이러한 변덕스런 영들은 마땅히 앞으로 좀더 나아가야 곳에서 무엇이든지 먼저 손에 잡히는 대로 붙잡고 그리고 완고하게 마땅히 다른 것과 함께 비교하여야 할 곳에서 한 말에 달라붙어 엄한 죄를 짓고 있다.
우리는 따라서 반듯이 더 나은 목표를 겨냥해야 한다.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바로 그 분명한 성경의 인도하심에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그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 받게 될 후손을 가질 것과 동시에 여호와가 그의 하나님과 그 자손들의 하나님이 이 될 것을 약속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축복의 저자로 영접하는 자는 모두 이 약속 상속자들이고 그리고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려진다.
칼빈의 요점은 이 반론에 진리의 한 요소가 있지만, 이것이 모든 두드러진 성경적 자료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이 믿음에 의한 미래 아브라함 자손들을 예시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에게 하신 약속을 제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그의 하나님과 그 자손들의 하나님이 될 것을 보증하셨다. 칼빈의 반응은 이거냐 저거냐가 아니라 둘 다 이다. 세례의 실행에 함의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약속의 상속자들이다. 더욱 믿음에 의해 그의 자손 된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아브라함 자손들 역시 약속에 완전한 참여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지금 그의 가족의 일원들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새 언약시대 안에서 적용하는 것을 계속한다.
유아세례에 대한 칼빈의 논증에 비판은 언약의 유일한 표증은 할례인데 그것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언약은 그 표증이 폐기되었음으로 그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칼빈의 대꾸는 표증의 변경이 언약을 변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오래 전에 폐기된 할례가 아닌 다른 상징에 의해 그의 언약을 확증하는 것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나를 대항하여 반대하지 말라. 이에 대하여 준비된 대답이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의 언약을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할례를 제정하셨다. 그러나 할례가 폐기된 후에는 그의 언약을 확증하기 위한 동일한 이유(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아직도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항상 부지런히 무엇이 둘에게 보편적이고 그리고 무엇이 우리에게 떨어졌는가를 살펴야 한다.
언약은 보편적이고 그리고 그것을 확증하는 이유도 보편적이다. 다만 확증하는 방법이 다르다-그들에게는 할례이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세례로 대치되었다. 만일 할례에 대한 대치가 없다면, 그렇다면 칼빈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가시키기보다는 실제로 모호하게 했다 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점에서 만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후손의 구원 보증되는 증거가 우리에게서 제거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의 은헤를 더욱 모호하게 하는 영향을 가질 것이고 그리고 전에 유대인들에 했던 것보다 우리에게 적게 입증될 것이다. 지금 그(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무한하신 선하심이 더욱 선명하게 자유스럽게 지구 위에 부어지고 어느 때보다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지는 이 때에 그리스도를 심하게 비방함이 없이 이것을 말할 수 없다.
칼빈의 언약적 해석학을 따르는 신약시대 언약 신학자들로, 우리는 구약 시대에 백성이 그들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들의 집합적 특성을 이해했던 것처럼 언약 공동체의 집합적 특성과 함께 우리의 성례적 삶에 관심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이 언약적 약속들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전 가정과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인격적으로 집합적으로 장성해 가는 중요성을 포함하고 있다.
결론
아직도 추구해야 할 칼빈의 언약적 사상과 관계된 몇 개의 영역이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이 성경 해석과 그리스도 안의 구원의 유익, 그리고 기독 윤리와 교회의 성례전의 삶을 구약으로부터 신약까지의 구원 역사에서 시종일관 드러난 하나님의 유일하며 영원한 은혜의 언약의 중요한 표현으로 여겼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려 한다. 비록 칼빈은 세대주의 자체와 마주칠지는 않았지만, 언약에 관한 그의 이해는 세대주의의 기본적인 명제들을 직접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언약의 은혜를 누리는 신약 시대, 칼빈 탄생 500주년도 포함되어 있는 이 시대에, 언약을 성경적, 언약을 신학적 수고의 중심적인 원리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자. 칼빈은 시편 25:10에서 주석한 것처럼 자신을 분명히 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언약 안에서 견뎌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일 것이라고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