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교회 설교의 역사적 검토
박윤선의 설교가 어떠했던가를 살펴보기 전에 한국교회 설교가 어떠했던 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런 노력은 박윤선의 설교와 그 설교가 한국교회에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영향을 주었던 가를 고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1)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
한국에서 첫 개신교회가 설립된 때는 일본의 1872년보다 11년 늦은 1883년이었다. 이때 설립된 솔내(松川)교회에 이어 1886년 인천 내리교회, 1887년 새문안교회가 설립되면서 점차 서울, 부산, 평양 등 주요 도시에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감리교회의 첫 목사가 배출된 때는 1901년이었지만, 장로교회의 경우 첫 목사가 배출된 때는 1907년이었다. 이 때 한국장로교회는 전국적으로 785개에 달했고, 세례교인은 1만8천여 명, 전체교인은 7만2천명에 달했다. 또 목사선교사는 49명이었다.
1912년에는 장로교총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당시 교회는 약 2천여 개였고 신자 수는 12만7천명에 달했다. 그러나 한국인 (장로교)목사 수는 69명에 지나지 않았고 목사선교사는 77명이었다. 한사람의 목사가 한 교회를 담임한다고 가정하면, 목사가 시무 하는 교회는 전체교회의 오직 7%에 불과했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선교사들의 관할 하에 있었고 선교사는 여러 교회를 관장하고 있었다. 결국 설교자들은 주로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설교관이 어떠했는가 하는 점은 그 이후의 한국교회의 설교
형식과 내용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신학적 이해가 크게 결핍된 당시의 이 주제 중심의 제목설교는 상당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목설교는 예화를 필요로 했으므로 정성구에 의하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장로교회의 최초의 신학 잡지인 ▩신학지남▩에서는 설교에 필요한 예화들이 “강도에 인용할 만한 비유”라는 제목으로 3호부터 게재되기 시작하였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 초기부터 다양한 예화가 설교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설교 형식은 제목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설교의 내용은 복음과 영생, 속죄, 구원, 하나님의 사랑 등이 포괄적 주제였는데, 그것은 당시의 시급한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설교는 천당과 지옥, 예수와 사탄, 선과 악 등을 대비하여 설교하는 단순한 것이었고, 그 내용은 복음적이었다. 이런 초기 교회적 설교경향은 1970년대까지 주된 설교양식이 되었다.
2) 초기(1920년대까지) 한국인 목회자들의 설교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기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절대적 영향 하에 있었으므로 설교에 있어서도 선교사들의 설교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인 사역자들의 설교란 선교사들의 그것을 모방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이 당시 활동한 대표적인 설교자로는 1907년 목사안수를 받은 7인의 목사인 서경조(1852-1938), 한석진(1868-1939), 양전백(1870-1933), 방기창(1851-1911), 길선주(1869-1935), 이기풍(1865-1942), 송린서(?-1967)와 김익두(1874-1950), 감리교의 전덕기(1875-1914), 최병헌(1858-1927), 김종우(1883-1940) 등이었다. 비록 목사안수는 받지 않았으나 근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신학도였던 윤치호(1865-1945)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들의 설교를 헤아려 볼 수 있는 자료는 1920년에 출판된 [백목강연](白牧講演)인데, 이 설교집은 한국 최초의 설교집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설교집에는 주로 1910년에서 1920년 어간에 교회에서나 기타 모임에서 선포된 설교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설교집을 중심으로 고찰해 볼 때 이 시기 설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① 영생과 구원, 하나님의 사랑 등 구원에의 초청이 주된 선포였다는 점
② 새로운 윤리의 표준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제시하고,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강조하는 계율적인 요소가 짙었다는 점
③ 도덕적 요소, 곧 권선징악(勸善懲惡) 혹은 상선벌악(賞善罰惡)적 강조에 치우쳤다는 점
④ 현세적 삶에서의 신앙보다는 내세적인 경향이 짙었다는 점
⑤ 충군애국(忠君愛國)적 설교가 많았다는 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