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아르미니우스와 동의한 점은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되 타락한 자들을 택하셨다는 사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미니안주의자들과는 달리, 그 성직자들은 통일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런 모든 타락한 자를 위해서 죽으셨는가에 대해서는 부정하였다.
전도와 선교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때에도 이런 제한된 속죄의 고백은 부정적이지 않다. 물론 아르미니우스가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전통적인 예정론은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앞세웠다. 그러나 구원의 근본원리가 인간론 중심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카톨릭은 세례관(화체설)을 통하여 신앙 없이 모든 지역주민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삼아 지역의 국가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역시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원론을 가지고 종교개혁에 앞선 루터주의자들도 세례관에 있어서는 카톨릭적인 정신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여 실제로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인으로 삼는 길을 열어 놓았고, 그것에 의해서 독일의 국가교회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웨슬레주의와 침례교도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으나, 전자는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취한 것이고 침례교는 같은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있다. 다만 침례교적인 퓨리탄인 죤 스미스와 같은 이는 어거스틴의 참된 신앙의 개념을 받아드려 역사적 신앙 혹은 지식신앙, 기적신앙, 일시적 신앙을 비판하여 교회의 순수성을 보전하고자 하였다.
이런 비판의 최소한 선에서라도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안에 일어나는 신유 은사들을 바로 참된 신앙의 결과인 것처럼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더구나 어떤 사람에게 계시나 이상이 임하였다면, 그것이 두 사람 이상의 검증 없이 교회 안에 공적으로 선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성경계시가 종결되었다고 믿는 것은 교회의 기초로서의 그런 계시가 종결되었다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성경 밖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의미에서 종결되었다는 의미이다.
참된 신앙의 정의에 대한 퓨리탄 침례교인의 좋은 어거스틴주의에도 불구하고, 침례교가 유아세례를 부정하거나 재세례를 주장하는 경우, 혹은 가시적인 중생의 체험과 확신을 요구할 때, 거기에 아르미니안주의를 열어놓은 것이 된다.
그에 반해서 개혁주의자들은 신론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과 교회에 관련해서도 예정론을 강조하였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령의 열매이며 그 근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정에까지 올라간다.
예정론을 통하여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였고, 그런 예정론은 보이는 교회 안에서 아무도 하나의 지체를 오용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뿌리가 되었으며, 동시에 잘 믿는 자에게는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오는 교리이다.
특별히 순전히 영적이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비밀로 남아 있는 예정론 사상은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 존중의 기틀이 되는 것이요, 가난하고 무시받는 자에 대해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반면에 보이는 교회의 부패와 사회부패에 대해서 비판정신과 혁명정신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루터주의는 이신칭의 교리만 가지고 어느 정도 의식적이고 제도적인 교회와 그런 종교사회를 비판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구약을 파괴하였고 성화(구원의 서정)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칼빈은 예정론에 의해서 참된 교회를 정의함으로 복음의 순교자들과 나그네된 자들을 변명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1638년 스코틀란드 총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아르미니안주의, 혹은 일명 카메론주의와 박스터주의를 정죄함으로 개혁하였으며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도 도르트회의의 타락후 선택설 정도만 허용하였다. 이런 고백의 선은 장로교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선명하고 확고한 것이다.
20세기에 와서 선교에 방해된다고 하여 구미의 보수주의 개혁교회 안에서도 제한속죄와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포기하려는 경향은 굉장히 우려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유기자를 위해서도 죽으실만큼 충분한 은혜를 강조하다보면, 그리스도와 교회밖에 구원을 허용하는 식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초칼빈주의를 비판하거나 아르미니안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칼빈을 발견하려는 자가 칼빈연구의 대표자들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칼빈 자신에 의해서 섭리에 관한 특별논고를 통하여 종결된 것이고 17세기에 비로소 리베트(A.Rivet)와 불란서 사뮤르학파(J.Camero, M.Amyraut) 사이에 칼빈의 예정론에 관한 논쟁에서 종결된 것이다.
역시 같은 경향으로써, 비록 타락전 선택설이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정의 주체로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조하여 제한속죄를 포기하려는 바르트주의는 루터주의는 될지언정 역사적 정통개혁주의와는 거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