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영적 형성’은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게 하는 훈련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태의 훈련 중에 포스터가 지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묵상 훈련’이다.그는 인간의 내면세계는 매우 영적인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적인 사귐이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묵상 훈련’은 곧 ‘하나님과의 대화’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터는 『영적훈련과 성장』에서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묵상을 꺼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실제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뉴에이지 적임)
묵상은 우리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은 묵상이 종교 전문가들(제사장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제사장이 된다.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나아가서 포스터는 ‘영적 형성’의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묵상 방법을 소개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상상(imagination)에 근거한 묵상이다. 상상이란 상당히 주관적일 뿐 아니라 성경도 이에 대하여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그래도 포스터는 상상에 근거한 묵상을 소개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예수님 자신도 이 방법으로 가르치시며 늘 상상력에 호소하셨다. 많은 경건의 거장들도 마찬가지로 이 길을 권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경건의 거장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프랑수아 드 살르(Francis de Sales)로서 두 사람 모두 신비주의자이다. 이와 같이 포스터는 신비주의자들의 방법을 여과 없이 소개하면서 상상에 근거한 묵상의 정당화를 찾으려하였다.
포스터는 여러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20세기의 최고의 영성가로 알려진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말을 그의 책에 즐겨 인용한다. 『영적훈련과 성장』에서도 묵상을 어렵거나 복잡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포스터는, 특별한 방법을 배우려하지 말고 자유스럽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유하면서 머튼의 글을 인용하며 소개하였다. 머튼은 1948년 출간한 자서전 『칠층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인물로서 평생토록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한 관상기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였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단어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적인 거룩한 삶의 중요성을 교훈하면서 이 개념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머튼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언급하고 있다. 이 연합은 실재의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만남으로서, 머튼은 수도원적 수도사들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지적할 때 사용하였던 ‘관상(Contemplation)’이란 단어로 그 뜻을 설명한다.
관상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의 영으로 되는 신비한 상태를 가리킨다. 머튼은 『관상의 새로운 씨앗들』(The Seeds of Contemplation)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관상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며 초월적이며 무한하게 풍성한 근원(Source)으로부터 유출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생생한 깨달음이다. 관상이란 무엇보다 그 근원에 대한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에게 관상이란 마치 직접 보고 만지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경험이지만 동시에 매우 신비하여 “언제나 우리의 지식, 우리의 판단, 조직적인 체계, 설명,강화, 그리고 우리 자신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결국 머튼이 말하는 관상이란 포스터가 설명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관상에 이르는 길은 그리 쉽지 않다. 머튼은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 감각의 어두운 밤을 지나 관상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 밤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밤은 마치 만물이 시야에서 시작되는 때, 두 번째 밤은 자정과 같이 완전한 어둠에 사로잡힌 때, 그리고 세 번째 밤은 빛으로 가까이 다가선 밤의 끝부분이다. 이 과정은 매우 오래 걸리기도 하며 노력한다고 항상 이루어지는 보장도 없다.어둠의 밤을 지나려면 인내하며 무한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는 무엇인가?그것은 관상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매우 구체적이며 효과 있는 방법이다. 이 기도는 특별한 형식이나 지적인 활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머튼은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기도가 변질되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과거 수도원에서 행하여지던 관상기도의 원리를 상실하였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관상기도』 (Contemplative Prayer)를 저술하면서 수도원적 관상기도의 부활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관상에 이르게 하는 기도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던 것을 중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어두움의 밤이 그치도록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머튼은 반복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관상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관상 기도란 그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을 때에 그 이름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역시 머튼의 관상기도는 포스터의 ‘하나님과의 대화’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
무엇을 말하는가? 포스터는 가톨릭 신비주의자인 머튼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의 개념을 자신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한 것이다. 머튼과 포스터는 동시에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신비한 경험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정체성이 독자적으로 있는 것을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정체성만 있는 것을 말한다.
만일 ‘하나님과의 대화’ 또는 ‘관상 기도’가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로 인도하는 도구라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묵상이나 기도가 아니다.어느 종교나 기도를 가르친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과 목적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는 그 대상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확신하고 그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빛을 기다리며 어둠속을 방황하는 것은 결코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를 신앙 훈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칼빈은, 성도가 기도할 때에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을 강조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