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신학논쟁이 그치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에 대한 답은 너무도 분명하다. 포스터는 신비주의자이며 가톨릭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가 2007년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은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있으며 자신이 인용하는 자들이 16세기 이전의 인물들이 모두 가톨릭이라고 한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는 신비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신비주의적 사상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종교개혁 이전의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의 글과 생각을 여과도 없이 소개하면서도, 그 사상이 신비주의적이며 그들이 신비주의자들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제도화된 교회로부터 소외되고 거부당했지만, 지난 2000년 동안 교회의 생명을 유지한 것은 신비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이라는 것이 포스터의 확신이다.
그는 레노바레의 ‘영적 형성’을 통해 세계 교회를 개혁한다는 비전을 품게 된 것도, 신학 논쟁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한국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퀘이커인 포스터는 가톨릭인 머튼과 나우웬과 사상적 교류를 나누었다. 포스터와 나우웬이 토마스 머튼의 사상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머튼과 나우웬의 신비주의적 가톨릭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관상기도와 기독교 영성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일반화된 사실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피터 트라벤 하스(Peter Traben Haas)는 지난 25년간 기독교 공동체 안에 관상적 방법이 잘 알려지게 된 것은 “토마스 머튼, 리차드 포스터, 달라스 윌라드, 유진 피터슨, 도로티 버틀러 배스, 브라이언 맥라렐, 리차드 로어, 버나데뜨 로버츠, 로빈 아미스, 그리고 특별히 토마스 키팅의 사역과 글을 통해서 가능하였다고 하였다. 스캇 맥나이트(Scott McNight)는 요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영적 형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때 어떤 책을 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토마스 머튼과 리차드 포스터 그리고 달라스 윌라드 같은 현대 작가의 글을 찾는다. 그러면 그들은 오랜 기간 교회에 영향을 주었던 고전적인 영적 거장들을 소개한다.” 이들과 사상을 공유하고 있는 필립 얀시(Phillip Yancey)도 영적 훈련에 관하여 “요즈음 책은 유진 피터슨, 달라스 윌라드, 그리고 리차드 포스터의 것을, 이전의 책은 토마스 머튼의 책을 권장한다고”하면서 머튼의 영향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허버트 더글라스(Herbert E. Douglass)도 토마스 머튼의 사상에 찬성하는 포스터의 기도 방법은 동방 신비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로 인하여 뉴에이지와 동방 신비주의, 보편구속설, 범신론으로 혼합된 관상 기도로 축적된 관상 기도가 기독교에 잠식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많이 있지만 여기서 멈추도록 하자.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포퓰리즘 뒤에 숨겨져 있는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정체성으로 인하여 계속된 신학 논쟁은 종식되어야 한다. 도리어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비성경적이며 반종교개혁적인 보이지 않는 큰 힘을 대항하여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요즈음 영성(spirituality)이 대세이다. 영성이란 기독교의 독특한 성향이 아니다. 가톨릭, 이슬람, 불교도 영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은 타 종교가 기독교의 담을 쉽게 넘는 도구가 되었다. 실상 한국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는 소위 영성의 대가들이 그 증거가 된다. 토마스 머튼, 헨리 나우웬, 리차드 포스너,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등은 모두 같은 사상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의 프로필과 글에 나타난 접근방법은 서로 상관이 없어 보여도, 그들은 신비주의적 가톨릭 영성을 기독교에 심어놓기 위하여 힘을 합쳐 한국교회를 압박하고 있다.
더욱이 포스터가 2009년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에 기고한 ‘영성 형성을 위한 우선 과제: 리처드 포스터가 말하는 앞으로 30년’는 한국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선포가 담겨져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지난 30년간 자신의 사역을 돌이켜 본 후, 앞으로 추구할 방향을 비전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앞으로 개인의 내적 성장의 사역을 넘어서 앞으로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 깊이 전념하는 것이지 분파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분리가 아니다. 분열도 아니다. 또한 새로운 교단의 설립도 아니다. 우리는 정해진 교회 구조 안에 머물며, 그 구조 안에서 작은 빛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는 계속하여 그 예로 독일 경건주의의 ‘경건한 자들의 모임’, 영국 웨슬리의 모임들, 노르웨이의 한스 닐센 하우게와 국내 선교를 두었다. 이러한 모임은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교회를 세우는 모임이 아니었다. 도리어 반교회적인 정서를 지닌 자들의 독특한 공동체로서의 모임이었다. 더욱이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초대교회의 몬타누스주의자들 이후로 산발적으로 존재하였던 분파주의자들을 칭하기도 한다. 그 예로 종교개혁 시대의 재세례파나 포스터가 속한 퀘이커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분리적인 교회론을 통하여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의 포퓰리즘으로 레노바레를 쉽게 받아드린 한국교회가 앞으로 그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의 제안도 여과 없이 받아드릴 것인가?
포스터와 레노바레가 한국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대형주의와 실용주의로 인한 영적 침체로부터 탈출하라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리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한국교회는 회복될 수 없다. 도리어 더 큰 혼란과 분열에 빠질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남겨준 유산의 가치를 재발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복음의 능력을 붙잡아야 한다. 나아가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성숙의 원칙과 교회 갱신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한국교회의 새로운 비약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달려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