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믿음에 대한 바른 지식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기초되어 있지만, 동시에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관련하여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기대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현실은 루터가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서 세상에 밝힌 이신칭의 같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는 ‘교리’에 대한 유익을 얻는 데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 대신에 믿음의 자유를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죄에 맞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에 대해서는 주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신칭의를 통해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그 믿음을 이웃에게 증거는 하지 않고, 이웃사랑을 통해 배려를 받고 있지만 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내세의 소망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 소망을 가지고 모험적인 삶은 살지 못한다.
특별히,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꺼이 이웃을 섬기며 살 수 있는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에 두고 있다. 비록 구속주와 죄인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두 인격적인 존재가 영적으로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인격을 가진 분(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믿음이라는 반지 때문에 신부의 죄, 죽음 그리고 지옥에 참여하시고, 이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이것들이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또 자신이 죄를 지으신 것처럼 행동하셨다. … 그러므로 믿는 영혼은 그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보증을 통해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며, 죽음으로부터 안전하게 되고,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믿는 영혼에게는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 생명 그리고 구원이 선물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죄와 그분의 의를 교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연합은 이신칭의가 단순히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의미도 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라는 존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가 발생하는데, 즉 이러한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나’의 ‘죄, 사망 그리고 형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분의 의, 생명과 구원은 ‘나’의 것이 된다. ‘나’의 죄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워지고, 그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더욱이,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가 연합했다는 사실은 그분과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공유한다는 것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잘 아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 2:5)’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고, 긍휼이 여시기며, 우리의 억울함을 신원하여 주신다(살전 4:6).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겸손함으로 남을 낫게 여기고, 이웃의 일을 돌아보며, 이웃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살아간다(빌 2:1-11).
구원의 조건으로써 이웃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과 기쁨 안에서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감사를 받든 비난을 받든,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 아무런 상관없이 섬긴다. 친구와 원수를 구별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우리의 의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자유롭게 섬기는 종으로서 행하는 것이다. 결국, 이웃을 섬기는 선행은 ‘이신칭의’의 실천적인 은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의롭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을 소유하고, 이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돕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처럼, 선행은 그리스도인의 이신칭의의 열매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