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목사와 에큐메니칼
코넬리우스 반 틸
I. 서론(Introduction)
개혁주의 목회자는 현대의 에큐메니컬 운동과의 대면을 피할 수 없다.
많은 동료 목회자들은 이러한 흐름에 대해 그가 열정이 부족하다며 꾸짖을 것이다.
심지어 복음주의적 동기에서 비복음주의자들과 협력한다고 주장하는 다수의 복음주의 성직자들에 의해, 그의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이 의심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목회자는 성경적 에큐메니즘(ecumenism)에 대해 어떤 긍정적 진술을 제시할 수 있는가? 성경적 에큐메니즘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 장의 목적은 성경적 에큐메니즘을 고찰하고, 현대 교회 안에서 널리 주장되는 에큐메니컬 사상과의 대조 속에서 제시하는 데 있다.
성경적 에큐메니즘의 기초는 최소한 아브라함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은 주권적 은혜(sovereign grace)로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es)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을 공식적으로 체결하셨다.
“보라, 내 언약(covenant)은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창 17:4).
세계 교회(world-church)는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처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계 7:9)의 수많은 무리는
어린 양 앞에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 있을 것인데,
이는 그들이 아브라함이 믿은 그분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에큐메니시티(ecumenicity)의 이야기란, 아브라함의 외로운 장막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배하는 대무리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났으며,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only-begotten Son)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그가 세상에 오실 때, 구주(救世)께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었다.
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마 1:21)라고.
그가 세상을 떠나실 때,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Βαπτίζω, Baptism)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그리스도 교회의 에큐메니컬 성취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초기 제자들은 그분의 사명을 슬프게도 오해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열어(눅 24:45)
그분이 오신 목적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눅 24:46)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 믿음으로 연합한 자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회개(Repentance)와 죄 사함(Remission of sins)을 전파해야 하였다(눅 24:47).
II. 작은 시작의 날 (The Day of Small Beginnings)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도들이여,
그 큰 무리가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날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노래를 마친 후에는 마침내 창조의 찬가를 노래할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고
그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그러나 장차 올 그날을 바라봄과 동시에,
뒤돌아볼 것도 필요하다.
이 수많은 회중은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그들은 자기 죄를 회개하도록 배우게 되었는가?
성경의 대답은 분명하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이 본성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받았기에
하나님을 인식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롬 1:21)
“불의로 진리를 막으며”(롬 1:18)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말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다”(롬 1:25)
그리고 결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사람은 본성적 상태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Spirit of God)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또한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고후 4:4)
이러한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의 현실 속에서,
사탄에게 눈이 멀고
범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자들이 스스로 믿을 수 없다면,
그 큰 무리는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그 대답은 오직 하나
— 성경이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grace) 안에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보내셨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이 되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이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하려 함이라”(갈 3:13–14a)
그리고 **성령 하나님(God the Spirit)**께서는
택하신 죄인들의 마음을 중생(regeneration)시키사
III.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은혜의 전개
(The Outworking of Grace in History)
이제 구속사(redemptive history)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안에 믿음을 심으시고(planting)
그 믿음을 **보존(protecting)**하셨다.
아브라함이 **인간적 계략(human strategy)**을 통하여
약속의 성취를 얻고자 했을 때,
주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삭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
물론 이스마엘도 일정한 축복은 받을 것이나
언약의 약속은 오직 기적적으로 태어난 이삭에게 속한다.
곧, 에큐메니컬 교회(ecumenical church)는
아브라함의 장막에서와 같이,
이삭의 장막에서만 발견된다.
각 나라와 족속 가운데서 구원받는 셀 수 없는 무리는
이삭에게 속한 자이며,
바로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들이다.
아브라함이 불신앙으로
이스마엘을 통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사라는 늙었으나
반드시 아들을 낳으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종의 여자의 아들
즉 이스마엘 위에 집을 세우려 하자
하나님은 사라의 말에 순종하라 하시며 말씀하셨다:
“이삭에게서 네 씨(seed)가 난다 할 것임이라”
(창 21:12)
그리하여 하나님은
**자기 소유의 백성(people for His own possession)**을
스스로 구별(separation)하신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법칙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아브라함의 참된 씨가 아니며
결코 구속받은 큰 무리 가운데 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곧 이스마엘도 아니요 에서도 아니다)
아브라함이 **혈통적 계승(physical descent)**만으로
에큐메니컬 교회를 세우려 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로 믿는 자만이
참된 교회에 속한다고 가르치셨다.
같은 원리가 이삭에게도 적용된다.
이삭이 장자 에서를 축복하려 할 때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이지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야곱이 에서보다 더 나은 자여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electing grace)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구별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그의 후손을 통해 성취하신다.
요약하면:
구별 | 기준 |
이삭 ↔ 이스마엘
| 약속의 은혜
|
야곱 ↔ 에서
| 선택의 은혜
|
남은 자(remnant) ↔ 불신 이스라엘
| 믿음의 순종
|
**“아브라함의 참된 씨”(참된 교회)**란:
✅ 혈통적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 **믿음으로 사는 남은 자(remnant)**이며
✅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중 다수가 불신앙 가운데 머문다면
언약 백성이라는 외적 특권은
오히려 심판의 근거가 된다
(신 28:62–63).
그러나 그 가운데
회개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모으시고
조상들보다 번성케 하신다
(신 30:2, 4–5).
결론적으로, 어떤 것도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사역을
방해할 수 없다.
❌ 이방의 불신앙
❌ 이스마엘과 에서의 불순종
❌ 혈통적 이스라엘의 불신앙
✅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sovereign grace)가
교회를 진정한 에큐메니컬 교회로 세우신다.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workmanship)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0)
곧,
성부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피로 이루시며,
성령께서 적용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교회 수립 사역이다.
그리고 이 교회의 머리는 바로 그리스도이시다(골 1:13–20).
IV. 그리스도는 교회를 모으신다
(Christ Gathers His Church)
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모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선한 목자(Good Shepherd)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친히 모으신다.
그리고 그 방편은 바로
사도들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이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행 2:39)
성령 강림 때: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행 2:44)
✅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행 2:47)
베드로도 깜짝 놀랄 만큼:
✅ “성령이 이방인에게도 부어지신 것”
(행 10:45)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민족을 위해
“저주를 받아서라도”(롬 9:3)
구원받기를 바랐으나,
그는 다음의 진리를 분명히 안다:
“아브라함의 씨라고 다 그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이삭으로부터 네 씨가 불리리라’ 하였으니”
(롬 9:7)
따라서:
✅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 약속의 자녀가
참된 씨이다
(롬 9:8)
그리고 그 기준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느니라”
(롬 9:16)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의 직분을 크게 여기며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얻는 의에
참여했음을 선포한다 (롬 9:30).
율법주의적 “거짓 에큐메니즘”의 도전
사도 바울은 곧 대항 세력을 만난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유대주의자들(Judaizers)**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도 믿고,
이스마엘과 에서도 함께 상속자라 하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에큐메니즘 아닌가?”
바울의 대답은 단호하다:
❌ 외적 표(sign)만으로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할례 포함)
✅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만
아브라함의 참된 씨다 (갈 3:7,29)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 4:31)
“너희가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 5:2)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은혜 단독(Sola Gratia)”
유대주의자들의 에큐메니즘은
은혜+행위의 복음이며
따라서 진짜 배타적이고 분열적이다.
바울은 밝힌다:
“그들이 너희를 배타하기를 원한다
이는 너희로 하여금 그들에게 관심 갖게 하려 함이라”
(갈 4:17 의도)
그들의 패턴은 다음과 같다:
1️처음엔 **포용(tolerance)**을 말한다
2️은혜 복음을 품은 자가 들어오면
3️오히려 그들을 몰아낸다
왜냐하면:
✅ 은혜 복음은 행위 중심 종교를 폭로하기 때문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자는
“그리스도는 아무 유익이 없다”고
선포하는 바울을 참아낼 수 없다.
결론: “참된 에큐메니즘은 배타적”
다음 진술은 필수적 고백이다:
진술 | 의미 |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구원
| ✅ 참된 에큐메니즘
|
인간 행위가 일부라도 필요
| ❌ 거짓 에큐메니즘
|
즉:
✅ 은혜 복음 → 배타적 포함(exclusive inclusion)
❌ 행위 복음 → 포용적 배제(inclusive exclusion)
모든 참된 신자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에서
부르심을 받아
**하나의 몸(교회)**이 된다
(요 17:16–18).
그들이야말로
참 에큐메니컬 교회이다.
V. 현대 개신교 에큐메니즘
(Modern Protestant Ecumenism)
역사적 개혁주의 에큐메니즘을
오늘날의 개신교 에큐메니즘과 비교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아돌프 비세르트 후프트(Adolf Visser ’t Hooft)가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에서 쓴
“에큐메니컬(ecumenical)이라는 단어의 역사와 사용”
을 살펴본다.¹
후프트는 “에큐메니컬”이라는 용어가
현대에 와서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²
1️교회의 세계 선교적 확대(missionary outreach)
2️교회의 조직적 일치(institutional unity)
3️그리스도인의 일치를 향한 의식과 열망(desire for Christian unity)
표면상으로는
성경적 에큐메니즘과 현대적 에큐메니즘 모두
다음에 동의한다:
✅ 교회는 선교 사명을 가진다
✅ 가능한 한 연합을 추구해야 한다
✅ 참된 연합은 참 신자들의 마음속 열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복음(Gospel)에 대한 서로 배타적인 이해”**에서 나타난다.
바울을 따르는 개혁주의자로서
나는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이
오직 은혜로 구원(Sola Gratia) 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판단을 정당화하려면
근대 철학과 근대 교회론을
길게 추적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핵심 흐름만 요약한다.
A.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현대 개신교 에큐메니즘의 신학적 배후에는
**칸트의 자유-자연 도식(nature–freedom scheme)**이 있다.
이는 중세 로마가톨릭이
그리스–아리스토텔레스 form–matter 체계를
기독교에 결합하려 한 것과 유사하게,
현대 개신교는 칸트의 사상과 기독교를 결합하고자 했다.
공통 결론: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며
도덕적 성취를 통해
보편적 연합에 참여한다.”
따라서,
현대적 에큐메니즘은
**포용(inclusion)**도 비성경적이며
**배제(exclusion)**도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 죄 없음 → 은혜 불필요
❌ 은혜 없음 → 구속사 부정
칸트에게 있어:
- 하나님 = 인간이 이상적 도덕을 투사한 개념
- 그리스도 = 도덕적 이상형(Archetype)
- 복음 = 인간의 윤리적 자기실현
결론:
대속(atonement), 은혜(grace), 칭의(justification), 죄(sin)는 부정됨
B.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F. Schleiermacher)
“근대 신학의 아버지”
그는 칸트의 도덕주의를 불만족스러워했고
그리스도 중심성을 말했으나,
그의 그리스도론은 다음을 전제로 한다:
인간 본성 안에 이미
“신적 요소(divine element)”가 내재한다
그래서 그에게 구원이란:
❌ “진노에서 은혜로의 역사적 전이”가 아니고
✅ “인간 본성의 잠재력 활성화”
즉,
항목 | 성경 | 슐라이어마허 |
원죄
| 실재
| 부정
|
중보
| 필요
| 불필요
|
교회
| 은혜 공동체
| 인간성 발전 공동체
|
결론:
모든 인간은 이미 교회에 속한다
→ 선교는 단지 발견(re-discovery)
C. 신정통주의(Neo-Orthodoxy)
(특히 칼 바르트 Karl Barth)
바르트는 다음을 주장한다:
핵심 전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와 은폐가 동시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 모든 인간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
- 죄는 존재론적으로 불가능
- 속죄는 역사 이전에 완결됨
- 선택(election)은 보편적
즉,
✅ 은혜 = 궁극적
❌ 진노 = 잠정적
결과적으로:
교리 | 개혁주의 | 바르트 |
선택
| 일부가 은혜로 구원
| 전 인류 보편 구원
|
회심
| 역사적 변화 필요
| 역사적 전이는 불필요
|
선교
| 복음 전파 필요
| 정체성 인식시켜주는 작업
|
결론:
그의 에큐메니즘은
“그리스도 안의 인간성의 보편적 연합”
Roman Catholic & Buddhist Convergence
바르트가 제시한 보편적 은혜론은
✅ 로마가톨릭의 신인협력적(Aristotle+Christ) 구원론과
✅ 불교적 인간성 개념(공성, 연기)과도
충돌 없이 접합 가능
즉,
“결국 모든 종교와 교회를 아우르는
인간성의 보편연대가 최종 목표”
정리: 현대 에큐메니즘의 전제
현대 에큐메니즘이 전제하는 것 | 성경적 평가 |
인간 본성은 선하다
| ❌ 전적타락 부정
|
모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
| ❌ 칭의, 회심 부정
|
구원은 인류의 자기실현이다
| ❌ 대속 부정
|
연합은 진리보다 우선한다
| ❌ 그리스도의 유일성 부정
|
VI. 종합 결론
(General Conclusion)
이 책의 목적은
**개혁주의 목회자(Reformed pastor)**가
오늘날 철학과 신학의 주요 흐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분명히 깨닫는다:
반(半)개혁주의적·타협적 변증학(Arminian apologetics)은
이 시대의 도전에 대응할 수 없다.
아르미니안 변증학은
겉으로는 성경적이지만, 실제로는
- 인간 중심(human-centered) 신학에 지나치게 우호적이며
- **은혜의 전적 주권성(sovereign grace)**을 약화시키고
-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원초적 대립(antithesis)**을 흐리고 - 이성·경험에 중립 영역이 있다고 인정한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주의(liberalism)와 신정통주의(neo-orthodoxy)의
침투를 허용하는 신학적 허점이다.
개혁주의가 증언하는 바는 오직 다음과 같다:
성경은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며,
구원은 그리스도 중심(Christ-centered)이다.
(Soli Deo Gloria / Solus Christus)
따라서 교회는
- 타협 없는 충만한 개혁주의 신학
- 성경적이고 변증 가능한 개혁주의 신앙 고백
- 오직 말씀과 성령에 기초한 진리의 연합
을 회복해야 한다.
최종 요약
두 신학의 비교 | 결과 |
아르미니안 변증
| 교회와 복음을 인간 중심으로 전락
|
개혁주의 변증
| 그리스도 왕권과 말씀 권위를 온전히 세움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금 개혁주의 신학을 통한
진리의 에큐메니즘을 회복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모든 사상과 철학 위에
높이 세우실 것이다.
“오직 성경과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복음 위에 서지 않는 에큐메니즘은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 코넬리우스 반틸적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