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서 탈락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듯한 구절들에 대한 설명
우리가 구원에 대해 이해할 때 이런 분명한 가르침들이 성경 해석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얼핏 보기에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구절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최종 심판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때문에 그때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구절들(마 25:31-46; 롬 2:6-11)은 참된 신자의 경우에는 최종 심판에서 결코 정죄 당하지 않으며 반대로 참된 신자가 아닌 경우에 반드시 정죄 당함을 가르치는 구절로 해석해야 한다.
최종 심판은 행위에 대한 물음이 반드시 있다. 하지만 최종 심판에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성령 안에서 행한 행위들”이다(갈 5:5 참조). 그렇기에 그 행위들은 믿음의 표징으로서의 행위이지, 믿음에 뭔가를 더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위에 근거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최후 심판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최종 심판에서 정죄 당하지 않는 근거를 “행위”에 잡는다면 “어떤 행위를 얼마나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불거지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 구원 받는 자가 생기기 위해서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된다. 첫째 경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최대한 낮추는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최종 심판대에서 결코 낮아질 수 없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경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어떻게든 만족시키기 위해서 부족한 공로적 선행을 위해 별별 짓을 다 하는 것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그런 신학에 빠져서 면죄부 장사나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자들을 의롭다 여기신다고 단순하게 가르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서 쌓아간 “행위에 근거하여” 판단하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의 엄위로운 의의 기준은 신자라 할지라도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사 64:6, 슥 3:3-4 참조).
최종 심판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행위”의 분량이나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다면 신자의 “행위”는 무엇인가? 신자의 행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참됨을 보여주는 “징표요 보증이요 열매”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행위의 양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행위가 공로가 될 수도 없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자들은 최종 심판대에 섰을 때에 비록 행위에 있어서 부족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고 해 주실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최종 심판대에서의 차등적인 판결이 있음을 가르치는 구절들(고전 3:10-15)은 구원이 아니라 상급과 관련해서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상급의 형태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토의할 문제이다. 차등상급이 계급적 위계질서를 낳는 형태여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상급이 물질적인 것으로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일단 알아야 한다. 영원한 천국은 완성이요 충만이기 때문에 위계질서를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마도 상급은 서로를 더 섬길 기회를 주시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 신자가 이 땅에서 살면서 구원의 길에서 도중에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구절들(갈 3:3, 딤전 1:19)은 참된 믿음이 있는 자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들 본문이 말하는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참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마 25:31-46에서도 마찬가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는 경고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최후 심판 때에 행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은 이미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았으나, 신앙생활에서 행위가 부족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고 하셨다. 여기서 “도무지(헬라어, 우데포테)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전혀 알지 못한다, 한 번도 안 적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최후 심판 때에 행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6장에서, 구원의 길에서 탈락할 가능성에 대한 언급들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고성”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히 6:4-9). 히브리서 기자가 그런 경고 뒤에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 6:9)”라고 덧붙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라고 질문한 것은, 아직까지 그들이 믿음에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므로 아직은 기회가 있는 상태에서 경고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그 구원의 길에서 결코 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은 위와 같은 설명으로 여전히 견지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 길에서 멀어져 버린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만일 그들이 그 상태로 세상을 떠난다면, 처음부터 바른 믿음을 안 가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살아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정말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지금은 그렇게 하나님과 멀어져 있어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종종 죽음의 자리(death bed)에서도 역사하사 구원을 이루신다.
셋째, 신자가 구원을 열심히 이뤄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은 구원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화의 삶을 권면하는 구절로 이해해야 한다.
특별히 그런 구절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도우심을 함께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빌립보서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라는 말씀은 곧 이어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신앙의 길은 인간의 책임성 있는 반응이 요청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은혜주심 속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