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제 구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해 보도록 합시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앞서 <물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 를 비유로 들어 보았습니다만, 사람이 물에 빠져 있는데 여러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앞을 보고 다니지 왜 빠졌는가?” “물에 빠지면 짚 오라기를 잡고 나와야 한다,” “조심해서 나오라” 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지만 물에 빠져 죽으을 앞둔 당사자에게는 그런 “강의” 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직접 뛰어들어 건져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당사자는 자기 능력으로 물에서 나오려고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것이 타종교에서 말하는 구원관입니다. 다른 종교는 이른바 자율적인 종교 (自律的宗敎) 입니다. 즉, 스스로가 자기의 힘으로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인 <죄문제>를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타율적인 종교 (他律的宗敎) 입니다.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직접 인간 세상에 오셔서 친히 인간의 희노애락 (喜怒哀樂) 을 체험하시고 친히 나무 (십자가) 에 달려 우리가 받을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사람은 타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다고 로마인서 3:11이나 3:23등에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처음서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히 12:2).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할 때 성부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인데 성부, 성자, 성령 등 삼위로 계신 분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3위로 항상 계신 분입니다. 구약시대는 아직 성자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은 것뿐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신인 현현 (anthropomorphiism) 은 모두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가령 이사야 6장 1절부터 보면 이사야가 선지자로 안수 받을 때에 문지방이 흔들리며, 연기가 성전에 가득 차며,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창화했습니다. 그 때 이사야는 거룩한 여호와를 보았다고 했는데 요한복음 12장41절에 보면 그때 이사야가 본 것은 주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구약 이사야 40장 10절에 나오는 여호와도 마찬가지로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럼, 이제 성삼위께서 어떻게 인간의 구원을 이룩하시는지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과정을 흔히 신학적으로 구원의 서정 (救援의 序程) 이라고 하고 Latin 어로는 Ordo Salutis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단계는 어느 정도 시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고 <성화>를 제외하고는 동시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단지 성화만이 오랫동안 지속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구원 얻을 자를 창세전에 택해 주십니다. 엡 1:4이나 로마서 8장 29절 등에 보면,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구원하시고저 하는 사람들을 예정하시고 우리를 택해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오고 가지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예수를 알고 구원을 얻고 간 사람의 수는 지극히 적습니다.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우리의 마음대로, 우리의 의지대로 되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해 주신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 자세히 보도록 합시다.
구원의 서정의 첫 단계는 효과적 부르심 (Effectual Calling)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어쨋건 하나님이 그가 창세전에 기쁘신 뜻대로 택해 주신 분은 그가 죽기 전에 언젠가 하나님의 정한 때에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불러 주십니다. 부르심이 첫 단계입니다. 부르심은 두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인 부르심 즉 Universal call 과 효과적인 부름 Effectual call 입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 집니다. 특히 오늘같이 통신 수단이 발달 한 사회에서는 누구나 쉽게 복음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부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게 되는데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거리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할 때 많은 사람이 모여서 같은 목사의 설교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듣지만 설교가 끝나고 나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몇 명만 남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깁니까?
어떤 분들에게는 복음이 특별히 사역하여 그 마음에 감동을 주고 어떤 분에게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왜요? 이유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효과있게 불러 주시면 그 마음에 죄에 대한 아픔이 생기고 영적인 문제에 흥미를 갖게 되지만 효과 있게 불러주시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는 효과 있는 부르심으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로마서 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난다” 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어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음악을 들어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로지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인데 말씀만이 아니고 말씀이 성령으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할 때 열매를 맺어 중생이 이루어 진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택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중생케 되므로 누군가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3:6 이하에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시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만 하면 그만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을 그의 뜻대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입니다. 에서는 먼저 출생했으니 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서보다는 동생인 야곱을 택해 주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이므로 인간이 힐문(詰問) 할 수 없다고 로마서 9장에 가르쳐 줍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