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유산
칼빈은 오직 은혜에 의한 칭의의 교리를 강조하였으나 동시에 경건한 삶의 훈련을 강조하는 성화의 교리도 중요시 하였다.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유와 감사함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율법과 주권적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신앙적 응답으로서 항상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수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 속에서 칼빈은 인문주의 교양교육의 영향을 따라 수사학, 자연과학, 미술, 음악 등에 대한 동시대의 지식과 문화의 영역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식과 문화는 종교적 신앙과 소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신정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원리를 따라 복음과 문화의 이원적 분리는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역사 속의 인간의 모든 문화행위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화 이해는 칼빈에게 있어 어떻게 복음의 진리를 실제적인 삶의 구체적 정황 속에 적용하여 새로운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제네바의 교회법규를 로마법의 원칙을 따라 수정하고, 예배에서 음악의 진가를 높이 평가하며,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교육적 혁신을 감행하고, 가난한 자와 난민들을 위한 구제와 복지를 제도화하고, 학문과 지식에 대한 기독교적 이론을 개발하는 실천적 문화 변혁자 칼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칼빈의 문화적 추구는 서구 사회의 대중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칼빈은 프랑스어의 근대화에도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프랑스 산문사의 백미로 알려져 있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불어판은 짧은 문장과 정확한 용어 사용 등으로 불어 자체의 발전적인 큰 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불어를 신학과 철학의 정확한 전문용어로 까지 격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초기 미국 문화 속에는 청교도들을 통해 전달된 칼빈주의적 유산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오늘도 그러한 청교도적 규범들이 미국 사회의 문화 현상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아직도 주일에 술을 판매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비기독교 인구가 많은 다문화 사회이며 개인의 권리를 고양하는 자유 국가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주일에 술을 구입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일반화된 규범적 가치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처럼 기독신자 공동체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시민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미국 문화의 일반적 현상이 되어 있다.
물론 전체적인 미국의 대중문화에서 미국의 건국 문화를 형성한 칼빈주의적 특성과 규범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 테러와 금융위기 등으로 불안한 미국에서 시사주간지 타임지(Time)가 최근에 “뉴 칼빈주의”(New Calvinism)를 “지금 세계를 변화시키는 10대 이념들” 중에 하나로 지적한 것은 칼빈주의가 여전히 미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적인 대답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칼빈은 중세의 시대적 격변기 속에서 교회와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밝히 제시해 주었다. 오늘도 우리는 그의 신학과 사상이 여전히 우리 교회의 갱신을 불러오는 교훈이며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날 칼빈이 성경의 교훈을 따라 제네바의 시민들과 난민들에게 윤리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며 서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생존 메커니즘을 성공적으로 제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사회의 경제, 정치, 문화의 변혁을 위한 실제적 힘과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