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The reading of the scriptures with godly fear; the sound preaching, and conscionable hearing of the word, in obedience unto God, with understanding, faith, and reverence; singing of psalms with grace in the heart; as also the due administration and worthy receiving of the sacraments instituted by Christ; are all parts of the ordinary religious worship of God; besides religious oaths and vows, solemn fastings, and thanksgivings upon special occasions, which are, in their several times and seasons, to be used in a holy and religious manner.
5. 경건한 두려움으로 행하는 성경봉독과 건전한 설교와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깨달음과 믿음과 경외함으로 말씀을 양심으로 들음과 마음에 은혜가 충만하여 부르는 시편 찬송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대로 합당한 성찬예식 등은 모두 하나님에게 드리는 일반 예배의 요소들이요, 이외에도 신령한 맹세들과 서원, 엄숙한 금식과 특별한 경우를 당하여 드리는 감사가 있으니, 이것은 그 때와 절기에 따라서 거룩하게 신령한 태도로 행사할 것이다.
5. 해설:
기도 외에 예배의 요소는 성경 봉독, 설교, 시편 찬송, 성례식(즉 세례식과 성찬식), 서원과 서약(결혼의 서약, 임직자의 서약 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집사나 장로나 목사로 안수 받을 때 서약하는 일은 성경적이다. 여기서 본문 5절을 자세히 연구하자. 우선, 성경봉독은 경건하게 두려움으로 해야 하며, 공 예배 때 너무 경박하게 회중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너무 빨리 읽는다든지, 경건치 못하게 읽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설교는 교리적으로 건전한 설교를 해야 한다. “건전한 설교”란 성경적인 설교를 말한다. 개인의 경험담이나 간증을 말함이 아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설교를 말한다. 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대언자(代言者)이다.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 사람의 말이 아니다.
Scotland나 Netherlands의 개혁파 목사들은 그렇게 설교했다. 청교도 목사들은 한 주일 동안 설교를 구상하고 작성하여 주일에 암송해서 설교했다. 청교도적인 설교가 어떤 것인가? Jonathan Edwards (요나단 에드워즈)가 1741년 7월8일 Connecticut 주 Enfield(엔필드)라는 작은 마을의 회중교회에서 주일 아침에 한 설교를 보라(신명기 32:35,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죄인”). 이것이 전형적인 청교도들, 아니 개혁주의 목사들의 설교 스타일이다. 이것을 오늘의 Schuller 목사나 Rich Warren 목사나 Joel Osteen 목사나 Norman Vincent Peale 목사(서거) 나 Kenneth Copeland나 Charles Cabbs 목사의 설교와 비교해 보라. 또한, 이들의 불건전한 설교 스타일을 모방해서 그대로 설교하는 한국과 미국의 수많은 현대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 보라.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문제인가? 판단하라.
설교는 건전하게, 다시 말하면 교리가 바른 설교를 하라는 말이다. 분명히 알자. 주의 종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이 행한 설교는 모두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는 엄연한 사실을(마 7:22-23, 고후 5:10). 말씀을 듣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양심적으로 설교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세상의 일을 생각하며 형식적으로 앉아서 설교가 끝나기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편을 찬송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노래하며 은혜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찬송은 종교개혁기부터 악기 없이 시편을 “a capella”로 노래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NAPARC의 회원교단인 “북미주개혁장로교단”, 즉 RPCNA(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Pennsylvania 주 Pittsburgh 에 본부)에서는 지금도 개혁주의 그대로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것을 종교개혁가들은 <Regulative Principle(규범 예배 모범)>이라 불렀다. 요한 칼빈도 악기 없이 시편만을 노래했다. 엡 5:19 나 골 3:16 말씀을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라고 했는데, 많은 목사들이 찬미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이고 신령한 노래는 복음성가로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지만,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LXX 에 보면 어떤 시편에는 humnos, 어떤 시편에는 그 제목이 psalmos, 어떤 시편에는 humnos psalmou로 되어 있다(예: 시 61, 66, 68, 83,등).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는 우리의 복음성가가 아니고, 모두 시편을 말함이 자명하다. 악기는 원래부터 개혁주의 예배와 관계가 없었다. 청교도들도 악기 없이 시편을 a capella로 찬미했다. 물론 Luther 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란 찬송가를 착사 작곡한 것은 우리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Calvin 이 새로운 찬송가을 작사했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당시 부흥사, 이를테면, Charles Finney(찰스 피니, 1792-1875), D.L.Moody(디 엘 무디, 1837-1899), 그리고 Billy Sunday(빌리 선데이, 1862-1935) 등이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부터 오늘의 찬송가가 등장한다. 이들은 청중의 흥을 더 하고자 기존의 a capella보다 “신나는” 음악과 악기를 사용하며, 그 전에 이미 영국에서 Isaac Watts(아이잭 왓츠, 1674-1748)가 전통을 깨고 자유찬송가를 작사 작곡한 것들을 도입하여, 미국의 부흥사들은 그들의 부흥에 적용했다. 설교 후 “예수를 영접할 분은 앞으로 나오시오” 하는 Billy Graham type의 소위 ‘altar calling" 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D.L.Moody 이며,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하도록 한 사람은 Fuller 신학교를 창립한 Charles Fuller 이다. 그는 40여넌간 전도방송을 하며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했다.
이런 찬송을 군중이 얼마나 좋아하는가는 오늘 Billy Graham Crusade에서 Just As I Am (우리 찬송가 339장)이 “전매특허” 처럼 불리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본질상 경건한 것을 싫어하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들을 좋아한다. 오늘의 청소년들이 Rock'n'Roll, hard metal music을 괴성(怪聲)을 지르며 좋아하는 모습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엿본다. Human autonomy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Human autonomy가 치유되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변화를 받을 때 되어진다. 진정으로 중생한 청소년은 오늘날 거의 없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모두 자동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WCF LC. 61). 많은 청소년들이 교회에서 설교 말씀보다 음악에 흥미를 더 느낀다. 그리고 그 음악은 경건미가 전혀 없는 세속화된 곡들이다 (Rick Warren의 목회를 보라).
또한, 성찬식과 세례식을 주님이 제정하신대로 행해야 하며 성례식은 받을 준비가 된 사람만 참여해야 한다. 보통 NAPARC의 교단들은 성찬의 경우 Restricted Communion Service(통제적 성찬식)을 행한다. 보통의 교회의 경우는 Open Communion Service (공개적 성찬식)이나, Closed Communion Service(폐쇄적 성찬식)을 행한다. <통제적 성찬식>은 철저히 검증되고 심사를 받아 준비가 된 본 교회 성도들만, 그리고 그 교회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외부 방문 성도들만 성찬식에 참여함을 허락한다. 폐쇄 성찬은 본 교회 성도 중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하고 준비된 사람과 외부에서 방문한 성도라면 역시 죄를 회개하고 성찬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참여한다. 개방식 성찬은 본 교회 성도 중 세례 받은 사람과 외부에서 방문한 성도 중, 세례 교인들은 모두 성찬식에 참여함을 허락하는 제도이다. 서약하는 일과 특별한 경우 일 년에 몇 차례 금식도 허용되는데, 진지하게 거룩하게 행해야 한다. 무엇이든 “되는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어디에 보아도 “거룩하게”, “두려움으로”, “경건하게”라는 말을 많이 쓴다. 오늘의 교회 예배 풍속과 비교해 보라. 오늘의 예배에는 무엇이 결여(缺如)되어 있는가? 경건미(敬虔味)가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예배에는 거룩한 성격, 즉 거룩한(holy), 경건미(godliness) 그리고 경외감(reverence, fear) 등은 모두 사라진지 오래고, 예배를 사람이 고안(考案)하여 사람의 생각대로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제멋대로 드리지만,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제정하신대로 드리는 예배만을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역설한다. <개혁주의 성도>라면 <개혁주의 성직자>라면 다시 생각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 예배라면 그런 예배를 무엇 때문에 드리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