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주관과 객관
오버만(Heiko A. Oberman)은 칼빈의 제네바 종교 개혁을 피난민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며 루터의 독일 종교 개혁과 부써(스트라스부우르)와 쯔빙글리의 도시 종교 개혁과 구별했다. 작고한 이 저명한 역사 신학자는 칼빈의 성경적 신학의 요체는 지상의 나그네(viator)로서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 사는 성도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갈파했다. 칼빈은 스스로 고백했듯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꺼이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De me non libenter loquor”). 그는 숱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과도한 핍박을 받았으나 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호하거나 변명하는 글을 쓰지는 않았다; 다만 말씀의 해석으로, 즉 신학으로 말하고자 했다. 칼빈의 초기 생애에 정통한 가녹지(Alexandre Ganoczy)가 말하듯이, “칼빈의 ‘나’는 불가분리하게 그의 교리에 부착해 있다. 루터의 경우, 주관적 요소는 종종 어떤 진술에 나타난 객관적 요소를 변모시킨다. 정반대로, 칼빈의 경우, 객관적 요소는 주관적 요소를 압도한다. 그러나 주관적 요소를 압도함으로써, 객관적 요소는 주관적 요소의 실체를 보존한다.”
그러므로 칼빈의 신학을 차치하고 칼빈의 생애를 알고자 하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전통적 으로 루터란들과 카톨릭 신학자들의 칼빈의 신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의 바탕에는 그의 생애에 대한 그들의 왜곡된 이해가 깔려 있었다. 칼빈은 비사교적인 폐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교제한 사람들은 당대를 움직인 정치가들, 지식인들, 종교인들을 망라했다. 칼빈은 가부장제에 매인 봉건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가장 가정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성경 해석은 부부의 평등과 가정의 중요성을 시종 일깨우고 있다. 또한 칼빈은 편집증에 빠진 사상가가 아니었다. 셀베투스(Michael Servetus)는 제네바에 이르기 전에 이미 화형을 언도받은 수배자였다. 셀베투스의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반삼위일체적 이해와 유아세례에 대한 제세례파적 이해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은 칼빈이었지만 그를 화형에 이르게 한것은 제네바의 정치인들이었다.
발트와 그의 지도를 받은 추종자들이 이와 같은 루터란들과 카톨릭 신학자들의 주관적 이해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고 칼빈의 ‘교리(doctrina)’를 재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신학은 지나치게 독단적이었으며 칼빈을 칼빈 자신의 텍스트로부터 읽기보다는 자신들의 변증적 신학에 맞추고자 했다. 그들은 기독교 강요의 첫 줄에 선포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대한 교리 부터 곡해했다. 최근에 칼빈 신학교의 신학자 멀러 교수(Richard A. Muller)가 그의 책 제목으로 삼았듯이 그들은 ‘각색되지 않은 칼빈(the unaccommodated Calvin)’을 추구하지 못했다. 비록 역사적인 접근이기는 하지만 오버만으로부터 스타인메츠(David Steinmetz)와 멀러에 이르는 신학자들이 발트의 신학으로부터 칼빈을 구출하고자 한 것은 치하할 일이다. 그들은 워필드와 바빙크가 그랬듯이 성경의 진리로부터 칼빈신학의 적합성을 조명함으로써 칼빈 신학의 고유성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단의 노력을 경주했다. 사실 이러한 노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예컨대 정통 화란 신학자들과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은 칼빈 신학을 있는 그대로 읽음으로써 장로교 신학을 수립하고자 오늘날까지 면면히 노력해 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