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의 장녀 엘리스 아펜젤러의 묘비 또한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로 왔노라”(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 그가 1885년 11월 8일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감리교의 첫 선교사 아펜젤라가 내한 할 당시 그녀는 어머니 태중에 있었던 셈이다. 그녀는 이화학당 교수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 교장으로 한국을 섬겼던 여성이었다. 이것은 2대에 걸친 봉사였다.
그의 아버지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주 서더튼에서 출생하였고, 지금의 드류신학교를 거쳐 선교사로 임명받고 내한한 첫 감리교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언더우드와 동역하며 한국교회건설에 기초를 세웠다. 배제학당을 세우고,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고, 문서운동과 성경번역에 매진했다. 이 일로 그가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선박 충돌사고로 한국에서 순직했다.
이때가 1902년 6월 11일이었다. 비록 그는 양화진에 묻히지 못했으나 그 의 딸과 그의 아들 아펜젤러 2세(Henry d. Appenzeller)는 양화진에 묻혔다. 아들 아펜젤러 2세는 신흥우를 이어 1920년 1월 배제학당 4대 교장에 취임하여 봉사했으나 일제에 의해 1939년 해임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미국에서 거주하던 중 1953년 12월 1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을 따라 그의 유해는 1954년 10월 18일 영화진에 이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는 신명기 33장 27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이렇게 보면 첫 선교사 아펜젤러와 그의 두 자녀까지 한국을 위해 헌신했으니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로 왔노라”는 말은 거짓됨이 없다.
루비 켄드릭(Ruby Kendrick)의 묘비 또한 우리의 시선을 끈다.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학교 교사였던 켄드릭. 그녀가 미혼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온지 겨우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가 1908년이었다. 1907년 9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황해도 개성여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급성맹장염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한글을 공부하며 훗날의 한국의 젊은이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자했던 켄드릭이었다.
그러했기에 그에게 있어서 천의 생명도 부족했던 것이다. 그녀의 묘 앞에 세겨진 비문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미국 남감리회 소속 텍사스 엡윗 청년회에 보낸 편지에 기록된 한 구절이었다. 그가 병으로 치료 받을 때 또 이렇게 썼다. “만일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회원들에게 열씩, 스물씩, 쉰씩 아침, 저녁으로 한국으로 나오라고 전해주세요.”이 편지는 텍사스 웹윗청년회의 연례대회 기간 중에 배달되었다. 멀리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이 편지를 들고 기도하던 청년들은 감명을 받았고, 곧 바로 켄드릭이 죽었다는 급보를 접하고는 함께 모여 있던 웹윗청년회원들은 슬픔은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 소식은 선교의 불길을 일으켰고, 3년 동안 텍사스 웹윗청년회의 20명의 젊은이가 선교사로 자원했다. 또 텍사스 웹윗청년회는 모금한 돈으로 켄드릭의 묘비를 세워주었는데 그것이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였다.
물론 외국인 묘역은 양화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이 양화진 아닌 다른 곳에도 묻혀있다. 캐나다 출신 초대 선교사 멕켄지(W. J. Meckenzie)는 황해도 소래에 묻혀있고, 남장로 출신 선교사들은 광주 양림동에 묻혀 있다. 스코필드박사(Dr F. W. Sschofield)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호주선교사들은 부산과 마산, 진주에 묻혀 있기도 하다.
(끝)
이상규 교수 (고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