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복음주의 생명 운동
이상원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대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 윤리학 교수)
들어가는 말
생명윤리의 전장(戰場)은 생명의 시작점과 생명의 종결 점과 관련된 경계선상의 상황에서 제기되는 윤리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최근 한국의 생명윤리현실은 명암을 함께 맞이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형법 제369조/제270조의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법의 개정을 주문한 선고는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로 간주되어 온 낙태관행을 법적으로 추인하는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서 어린 아기 살해를 법적으로 공인하는 반생명적인 현실로 한국사회를 밀어 넣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는 바, 이 법은 소극적 안락사를 배제하고 불가역적인 사망의 상태에 돌입한 말기환자에 제한하여 일반적인 연명치료를 지속하되 특수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법안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법안의 자구하나만 바꾸면 언제든지 일반적인 연명의료의 중단을 의미하는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으로 탈바꿈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으며, 환자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반영할 수 없는 추정 및 대리판단을 법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한 비판과 감독을 소홀히 하면 반생명적 법으로 둔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나아가야 할 생명운동의 방향은 어떤 것인가?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성산생명윤리연구소는 “복음주의 생명운동”을 발제 주제들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고 필자에게 발제를 부탁하였다. 필자는 기도하면서 생각하다가 생명 운동 자체가 거의 없었던 미국에서 생명 운동을 시작하여 오늘날의 탄탄한 생명 운동의 기틀을 놓은 프란시스 쉐퍼의 생명 운동을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쉐퍼의 생애를 개관함으로써 그의 생애와 사상의 발전과정에서 생명운동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살펴 본 후에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를 중심으로 한 그의 사상을 개관해 보고, 마지막에 그의 생명운동과 사상이 주는 의미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I. 진리의 증거와 실천에 헌신한 생애
쉐퍼는 1912년 1월 30일 미국 펜실바니아 저먼 타운에서 독일계 미국인 부모였던 프란시스 어거스트 쉐퍼 3세(Francis August Schaeffer III)와 베씨 윌리암슨 쉐퍼(Bessie Williamson Schaeffer) 슬하에서 태어났다. 쉐퍼는 가정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여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목수 일을 도와야 했다. 쉐퍼는 11살 때 루즈벨트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아버지를 도울 목적으로 목공과 공예 과목을 선택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쉐퍼는 가난하고 소외된 인생의 밑바닥 길을 걸었고, 인생에 회의를 품기도 했다. 시간제 노동을 하고 있던 쉐퍼는 러시아에서 망명 온 귀족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는데, 이 귀족은 철학책을 교재로 사용했다.
쉐퍼는 이때 철학의 세계를 처음으로 접하기 시작했으며, 철학뿐만 아니라 서양의 고전과 성경을 두루 읽었다. 쉐퍼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했으나 이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서는 인생과 세계에 관하여 품고 있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8세가 되던 1930년에 쉐퍼는 6개월간에 걸쳐서 성경 전권을 통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성경을 통독한 후 쉐퍼는 모든 인생과 세계의 문제들이 성경 속에서 통일된 사상체계로 연결되어 마치 실타래가 풀려지듯이 다 해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동시에 이 해에 쉐퍼는 복음주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서 복음적인 기독교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경제를 돕기 위하여 기술을 가르치는 드렉셀 연구소에 들어간 쉐퍼는 기술자의 길과 신학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1931년 9월에 햄프든-시드니(Hampton-Sydney)대학에 진학하여 철학을 전공하고 1935년에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해 7월 중국 선교사의 딸 에디스와 결혼하고 9월에 정통주의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 쉐퍼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성경은 사상뿐만 아니라 단어들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영감 되었으며 오류가 없다는 성경관을 익혔으며, 진리는 경험적으로 체험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성적으로도 전달될 수 있다는 구프린스턴 신학의 전통을 받아 들였다. 비록 전략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코르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의 전제주의적 변증법을 받아들였고, 특히 삶의 전 영역에서 구현되어야 할 삶의 체계로 칼빈주의를 역설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사상을 충실하게 이어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3년간 공부하던 쉐퍼는 천년기전 재림론과 완전한 금주운동에 대한 의견차이로 웨스트민스터 교수진과 입장을 달리했던 매킨타이어와 매크레이가 분리해 나가 설립한 페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로 옮겨 졸업했다. 1938년 성경장로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펜실바이나주의 체스터시,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 등에서 1947년까지 목회활동을 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 교회 지도자들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를 결성하여 세계교회 연합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세퍼가 속한 성경장로교단은 국제기독교연합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설립을 앞두고 유럽교회의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를 느꼈다. 교단에서는 쉐퍼를 유럽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쉐퍼는 교단의 파송을 받고 약 3개월간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지를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 쉐퍼는 신정통주의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설교를 듣고 실망하는 한 편 오 할레스비(O Hallesby)와 마르틴 로이드 존즈(Martin Lloyd Jones)와의 교제를 통하여 위로를 얻는다.
1948년에 유럽 선교사로 파송 받고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쉐퍼는 유럽의 교회와 신학이 역사적 기독교의 교리적 입장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위기는 주로 성경관의 분야에서 나타났다. 자유주의 신학의 성경비평에 반대해 오던 복음주의자들은 칼 바르트(Karl Barth)가 자유주의를 급격하게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고무되어 바르트 신학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바르트를 전거로 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성경해석학을 복음주의자들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쉐퍼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실존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성경관에 있어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우려는 빈번하게 표명되었다. 쉐퍼는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실존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신학, 과학, 문화의 제반 영역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개탄했다. 쉐퍼는 바르트의 성경관을 비평하면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성경무오의 원리를 철저하게 견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쉐퍼는 Genesis in Space and Time(창세기의 시공간성)에서 창세기 처음 10장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성경의 교리들이 무너진다는 점과 성경은 역사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해도 오류가 없으며, 인간의 구원뿐만 아니라 우주의 기원의 문제에 대해서도 참된 답변을 주는 책임을 강조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