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생명윤리 사상
1) 쉐퍼의 생명윤리 사상은 그의 전집 5권 3부,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생명의 시작과 관련된 문제로서 낙태와 영아살해, 그리고 생명의 마지막과 관련된 문제로서 안락사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서구문화는 인간의 생명의 신성함을 특별하게 중시해 온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서구의료계는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히포크라테스 서약을 골간으로 하여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해 왔는데 , 1948년 세계의학협회의 제네바선언은 잉태의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표해야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그 전통이 구체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971년에 피츠버그대학교가 의과대학 졸업생 서약 문서를 히포크라테스 서약으로부터 제네바선언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잉태의 순간부터”라는 어구를 빼 버렸다. 같은 일이 토론토 의과대학에서도 일어났다. 이 사건은 서구사회에서 인간의 생명이 소홀히 평가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히포크라테스 서약과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태도가 활짝 꽃필 수 있었던 것은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이 서구를 수세기 이상 지배하면서부터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을 독특한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낙태와 유아살해를 살인으로 간주했는데, 이와 같은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낙태와 유아살해를 시행했던 로마의 문화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서구사회에서 인간의 생명이 소홀히 취급되기 시작한 계기는 서구사회가 유대/기독교적 토대를 떠나서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인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인본주의는 인간을 비인격적인 우주 안에서 우연하게 생겨난 결과물로 파악한다. 인간의 두뇌는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컴퓨터보다 나을 것이 없는 존재로 파악된다. 따라서 인간의 두뇌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구태여 형이상학이 동원될 필요가 없다. 유물론적인 인간관은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들의 가치를 극적으로 떨어뜨리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독특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면 인간을 잘 대해줄 수 있는 근거가 상실되고 온갖 형태의 비인간적인 행위와 태도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게 된다.
이 변화가 제일 먼저 감지된 곳이 법의 영역이다. 법의 토대 역할을 담당했던 기독교적인 합의가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자의적이고 사회학적인 법뿐이다. 역사의 어느 순간에 다수의 시민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법이 된다. 그런데 다수의 시민들의 의견은 현재적인 사회학적이고 경제적인 선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정부의 소수 엘리트들에 의하여 지배당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다수의 법은 사실은 소수 엘리트 관료들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제정된다.
또 하나의 변화는 생명공학의 이름으로 나타났다. 인간이 만일 우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유전자 형태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면 사회경제적으로 더 우월한 자질을 갖춘 존재로 변화시키기 위한 유전자조작실험 대상으로 인간을 이용하지 말아야 할 하등의 이유는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인류는 일부 인사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자의적으로 개조될 위험에 노출된다. 다시 말해서 인류는 이른바 사회생물학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은 인간은 유전자의 구성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유전자는 번성하는 종의 유전자 풀을 유지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인간은 유전자가 유전자 구조를 살아 있게 하고 미래에도 번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최선이라고 알고 있는 그 일을 행한다.
사회생물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환원주의적인 유전자 결정론을 낳는다. 곧, 모성애, 우정, 법, 도덕이 모두 유전자의 작용의 산물로 환원되어 버린다. 따라서 유전자만 조작하면 생물학의 영역의 문제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모든 문제들까지도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일단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포기하면 온갖 유형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통제할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낙태, 유아살해, 안락사, 아동학대, 포르노, 정치범고문, 범죄율의 폭발적인 증가, 무차별 폭력 등을 묶어 놓았던 고삐가 풀려 버리게 된다.
(계속)
이상원(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대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 윤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