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참배 반대 운동
떠나기 어려운 나 자신! 보내기 싫은 마산 교회 형제들! 아 가슴에 뭉친 한없는 한탄에서 말 못하고 흐르는 눈물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잊을 수 없었다. 나는 부산으로 나가 약 1년이란 세월을 가만히 침묵하고 있으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방법은 신사 참배하는 목사가 인도하는 교회에는 교인으로 하여금 신사 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게 한 것이며, 신사 참배한 목사나 교인들에게는 인사도 아니 하며 한 자리에서 먹지도 아니하여 교우들에게 보여 주니, 이와 같이 신사 참배하는 교회에 참석하지 아니하며 신사 참배한 사람과는 인사도 아니 하고, 한 자리에서 먹지도 아니하는 교인이 차차 많게 되어 마침내 전국적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나는 어느 주일날 예배 보러 갈 교회가 없으므로 산에 올라 가서 홀로 예배를 보았다. 예배하는 순서에 따라 찬송도 하며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며 설교도 하여 모든 순서가 다 되었는데 마지막 축복 기도도 하여야겠는데 앞에 교인이 보이지 않는지라. 나는 두 손을 들어 우리 강산 교회를 향하여 축복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한국 교회가 장차 여호와의 축복을 받을 것을 기뻐하였다.
그 후 1939년 여름이었다. 부산 근처인 해수욕장에서 몇 사람의 동지가 모여 수양하면서 기도하였다. 이때가 우리 한국 교회의 재건의 시작이었다. 그 때부터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동기가 되어진 것이다.
기도하는 중 한국 교회를 위하여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철저히 할 필요를 깊이 느낀 것이다. 이 수양회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하루는 마산 교회 김두석이란 여학교 선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 내용은 신사 참배 문제로 고민이 되니 어떻게 해결할 방침이 없을까 함이었다.
나는 즉시 마산으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문제는 단순하지 못하였다.여학교 선생으로 처녀인데 이 여선생의 받는 월급으로 늙은 어머니와 홀로 있는 오빠, 이 세 식구가 그날그날 생활하여 가는 것이다. 만일 신사 참배를 하지 않으면 학교 선생으로 있을 수 없으니 3인의 생활은 물론 어려운 문제이고, 신사 참배를 할려니 신앙 양심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요, 신사 참배를 하지 않고 그대로 선생으로 시무할려니 남자도 견디지 못하는 일을 처녀의 몸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같이 계시는 주 예수여! 이 일을 어찌하오리까?” 나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세 식구를 향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주님께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모든 생활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을 믿는 신앙만 있다면 학교 선생 직을 사직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이 떨어지자 늙으신 모친은 “나는 이대로 죽임을 당하여 죽을지언정 신사 참배하고 받는 월급으로 먹고 살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 김두석 선생은 쾌활하게 “나는 학교 일 보는 것 그만 두겠습니다.”하며 이제는 3인의 생사 전부를 주님께 맡긴다는 기도로 그 밤을 나하고 네 사람이 혹은 울며 혹은 기뻐하면서 기도의 밤을 지낸 것이다.
이는 목사인 나 역시 생활의 앞길이 막연한 것이었다. 그 후 김두석 선생의 2개월 동안 옥중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생활은 전 한국 신도에게 무언의 설교가 된 것이다. 동시에 그 오빠와 그 어머님, 아!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의 생활,그 쓰라림의 사정을 그 누가 알 사람이 있으리요.
1939년 10월경이었다. 나는 밀양군 마산리란 작은 촌 교회에 가서 2-3개월간 고요히 침묵하고 있을 때에 된 일 중에 한 가지 증거 하고자 한다. 이 작은 촌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일주일 전에 세례 베풀 것과 성찬 먹을 광고를 하고 그 주일 안에 세례 내용과 성찬 준비가 다 되었는데, 주일을 당하여 새벽에 예배당에 나가 기도하는데 내 일생을 통하여 기도하던 중 그 때와 같이 어려움을 당한 그 경험은 나 자신 외에는 알 자가 없을 것이다. 무엇이라 어떻다고 말하여야 좋을지 한 말로 말하자면 기도가 되어 지지를 않는다는 것인데,기도만이 안 된다는 것보다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 무서운 세력이라고 할런지, 형언할 수 없는 일을 당한 나는 견디다 못하여 산으로 도망하여 5일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경찰서에서 목사, 장로, 집사, 제직 전부를 호출하였다. 그리고 목사가 산으로 간 후 교우들은 철야하며 교회를 떠나지 않고 기도하여 많은 은혜를 받아서 성례를 거행함보다 이상으로 주님 위하여 헌신할 힘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제직 전부가 경찰서에 갔었다. 사건은 신사 불참배한 일인데 나에게 신사 참배 못할 이유를 말하라 하기에 나는 산에서 기도하고 온 것만큼 힘이 있었다. 열심히 신사 참배 못할 이유를 말하는 중에 중지를 당하였다. 그리고 동행한 장로 집사들에게 신사 참배 가부를 물었으나 전부가 힘있게 반대하였다. 이상하게도 경관들이 힘을 잃어 말을 잘 하지 못한다. “오늘은 그만 두고 수일 후에 너희 교회로 가서 전 교인들 있는데서 신사 참배 인식을 시킬터이니 그리 알고 오늘은 다 돌아가라”고 하였다. 우리는 무사히 돌아 와 승리의 기도로 감사를 드리고 수일 후에 오겠다는 경관을 기다리면서 기도하였다.
하루는 정복 혹은 사복 입은 경관 4인이 그 이웃 동리에 있는 경방대원인 청년 삼, 사십 명을 데리고 와서 교회를 둘러싸며 시위를 한다. 촌사람들이 크게 야단이 난 것처럼 두려워하여 어찌 할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불신자들은 교회가 당장에 없어지는 것 같이 구경을 한다. 목사인 나에게 한 시간 이상이나 신사 참배 강요하며 위협을 하였다. 그 다음으로 장로를 불러서 말하였으나 신사 참배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하매 “전에 한 목사 오기 전에는 어찌하여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였느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전에는 너무 강제로 위협함에 부득이 하여 하겠다고 하였지마는 이제는 죽어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경관들은 목사와 장로에게는 실패한 줄 알고 교인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여 인식을 시킬려고 하였으나 한 사람도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 경관들이 돌아가면서 내일 아침에 목사와 장로는 경찰서로 오라하고 가더니 이튿날 아침 일찍이 와서 하는 말이 “한목사! 오늘 어디로 갈 일 없느냐?” 묻기에 그 때 미리부터 부산 가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으므로 나는 “부산 갈 일이 있노라”고 대답하였다. 경관들은 말하되 “그러면 부산으로 가라 그리고 한목사가 경찰서에 오지 않으니까 장로도 경찰서에 올 것 없다”하면서 떠나고 말았다.
아! 진실로 우리와 같이 계셔 주시는 주님은 어찌 이렇게도 권능을 베푸시는지! 성찬을 베풀려던 그 주일날에 기어코 산으로 보내어 기도하게 하시며 온 교회로 하여금 또한 기도하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받은 은혜로 이렇게 승리하게 하시니 과거 기독교 역사 중 목사가 성찬을 베풀기로 준비한 주일에 교회를 비어 두고 산으로 도피 하였다는 것은 보지도 못하였고 또는 듣지도 못하였으며 또한 정신병자가 아니고야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정신에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지내고 보니 어찌 그리 하였던 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는 참으로 찬송한다.
1939년 12월경이었다. 경찰서에서 다시금 우리 교회 제직 전부를 호출하여 목사 장로를 옥에 가두었다가 2주일인 15일을 지나,한목사와 장로는 경찰의 수단과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자기들의 낙망에서 인지 모르나 우리들을 출옥시켰다.
그리하여 일반 신자들은 우리를 의심하였다. 신사 참배하기로 허락하지 않고는 결단코 2주일 만에 출옥할 수 없다 하여 우리들을 불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가두었던 밀양 경찰서 서원이 이를 증명하였다. 검속당한지 2주일 만이었다. 경찰서 서장이 나를 불러 인식을 시켜 볼려고 할 때에 나는 기도하기를 “나와 같이 계시는 주님이시여! 내 연약함을 아시오니 이때에 주님께서 저를 돌보아 주시옵소서.”하며 나는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였다. 경찰서 서장이 나를 주목하여 보더니 하는 말이 “신사 참배를 못 하겠다 하니 만일 금후로 다른 법에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하며 고등계 주임을 보고 출옥 시키라는 것이었다. 장로님을 모시고 우리는 출옥하여 우리 교회를 향하여 돌아가는 도중에 온 교우들이 나와서 우리를 영접하여 주었다.
그 중에 한 여자 청년이 나에게 묻기를 “목사님 어떻게 되었습니까?”한다. 이는 신사 참배하기로 허락하고 출옥하심이라는 의미의 물음이었다. 나의 대답은 “주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요, 주님만 신뢰하여라! 그러면 권능을 얻으리라”하였다. 신사 참배 문제로 검속 되었다가 2주일 만에 무사히 출옥됨은 전국에 없는 일이었으므로 일반 신자들이 우리를 의심함도 무리는 아니었다.
1939년 12월경이었다. 이인재란 형님이 평양신학교에 공부하러 갔다가 신사 참배 문제로 개학을 못하매 평양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인 교수를 받고 있었다. 이 때 어떤 청년이 와서 돈 4백원을 주면서 말하기를 “신사참배 하지 않는 운동에 사용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기로 그 돈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서 상의하는 것이었다. 인재 형님은 부산 근처인 해수욕장에서 같이 수양하며 기도하던 분이요, 신사 불 참배 운동을 하여 한국 교회의 신앙 자유를 부르짖으며 한국 교회의 신앙 부흥 운동을 하리라는 나의 중심을 아는 분이었다.
그리하여 이인재 형님과 같이 경남 각 지방을 순회하며 신사 참배 반대는 물론이고, 각자 개인 신앙 부흥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실행할 조목은,
1. 신사 참배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아니할 것.(이는 신사 참배하 는 목사가 그 교인을 인솔하여 가지고 시시로 신사 참배하러 가는 것 때문이다.)
2. 신사 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아니할 것.
3. 신사 참배한 교회에 십일조와 연보를 하지 아니할 것.(우리 개인 신앙 부흥 운동하는 일에 연보하여 도와 주기 위한 까닭이다)
4. 교회 출석하지 않는 교인끼리 모여 예배 하되 특별히 가정예배를
할 것.. 등
경남에 있어 분담하여 일할 구역은 부산 지방, 마산 지방, 진주 지방, 거창 지방, 통영 지방의 5구역으로 하여 각 참배 반대를 하며 개인 신앙 부흥 운동과 함께 연락을 취하였다. 이렇게 운동하며 다니는 중 가는 곳 마다 모든 신도들이 크게 환영하여 주었다. 신사 참배한 목사들 중에도 이 운동에 가입하는 목사도 있었고, 가입하지 아니하는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배척을 당할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그 중에 한 가지 내가 담대하여진 것은, 어느 날 나는 마산에 있는 김두석 여자 선생 집에서 자고 새벽 여섯시 경이나 되었을 때에 의외로 마산경찰서 고등계 형사 한 사람이 와서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이 집에 어떤 손님이 오지 아니 하였느냐?”고 묻는다. 나는 경찰서 고등계에서 와서 묻는 줄 알았다.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니 무엇이 두려우리요? 내가 곧 나서면서 “예, 제가 왔습니다.”
“한목사요?”
“예,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답을 하였다. 물론 이 형사는 어떻게 알았든지 한목사가 이 김두석 선생 댁에 와서 자고 있는 줄 알고 찾아 온 것이었다. 문답은 다시 계속하였다.
“ 한목사 요사이 무엇 하노라고 이곳저곳 다니느냐?”고 한다.
“신사 참배 반대 운동하러 다니노라. 그리고 이 반대 운동은 결단코 비밀로 하지 아니하겠노라. 왜 그런고 하니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다하여 놓을찌라도 또 다시 당신들이 경찰의 힘으로 탄압을 할터이니 우리들의 운동이 무슨 효과가 있으리요? 그러므로 우리는 합법적으로 정부가 양해되도록 할터이니 안심하시오”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이 잘 되느냐?”
“물론 잘 됩니다. 신자로서 누가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리요?”
“혹 여가가 있으면 경찰서에도 자주 와 주시오.”한다.
나는 물론 금명일간에 검속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후 2, 3개월이 되도록 검속하지 아니하였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께서 친히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