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성경이 말하는 "유일신"의 개념은 어떤 것인가? 그의 말대로 무엇이나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혼합주의(syncretism) 사상일 뿐이다. 기독교는 혼합주의를 배척한다. 성경이나 <Westminster 신앙고백서>나 어떤 역사적 신앙고백서도 그렇게 유일신이 모든 종교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은 없다.
기독교는 가장 배타적인 종교이며 가장 순수성을 요구하는 종교이다. 이유는 야훼 하나님은 독특하시고 유일하시며 그 앞에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 거룩하고 인격적이며 영원하고 스스로 계신 분으로 세상에서 "신"이라고 일컫는 어떤 피조물과도 견줄 수 없는 진리 바로 그 분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신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우상들이고 우상은 피조물이며 조물주가 아니다. 그 목사의 성경에는 "다른 모든 것을 포용하라"고 되어 있는지 몰라도 정통 개혁주의 성도의 성경에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했는데 이 말은 다른 신을 인정하지도 말며 그런 신을 칭송하지도 말며, 그런 신과 상관도 하지 말며 그런 신에게서 배울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의 성도는 바울의 말대로 <정결한 신부>이다(고후 11:2).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는 사도요한의 말대로 "진리 안에서 행한다"(요삼 4).
또한 그 목사는 "나는 개신교 수도원을 만들겠어요. 개신교는 영성이 약해요. 개신교에 대한 비판을 달게 받아야지 알레르기를 일으키거나 거부감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나는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진보적으로 행동합니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일부는 필자도 수긍한다. 요즘 기독교가 참다운 성경적 영성이 결여된 것은 누구나 참 성도라면 눈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다. 얼마나 교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가? 참으로 요지경 세상이다. 개혁주의자들은 탄식한다. 칼빈주의(개혁주의)를 따르는 성도들의 눈으로 볼 때 "예루살렘의 여자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서 울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때이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다. 애곡해도 눈물이 없는 세대이다.
그 목사님은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은 진보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표리가 같아야 하므로 행동도 보수적이면 얼마나 바람직할까 생각한다. 사람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같은 차원이어야 한다. 생각과 행동이 다를 수 없다. 그리고 성경을 보수적으로 믿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란 말인가? 그것이 "Ultra-Conservative Christian"으로 매도당할 신앙태도란 말인가? 언어도단이다.
이런 잘못된 신앙관 때문에 오늘의 한국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적당히 믿는다면 과거에 우리 앞에 간 그 많은 성도들이 로마의 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살을 찢기며 사지를 찢기며, 혹은 장작더미 위에서 불에 타 죽을 필요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들은 그 목사가 말하는 Ultra-Conservative한 Christian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 Ultra-Conservative한 신앙 태도를 고치지 못해 바보처럼 죽어갔단 말인가?
"개신교를 비난하면 알레르기를 일으키거나 거부감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기독교는 비난의 대상이고 천주교나 불교는 기독교의 mentor 라는 말인가? 그 목사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의 구원의 도리를 잘 알 수 있는 사람으로 본다. 만일 그 근본적 차이를 안다면, 즉 사도행전 4:12에 "천하 만민에게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만민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 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 같다. 참 성도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at face value) 믿어야 한다. 이것은 절대자(절대자란 상대할 자가 없다는 말)이며 천상천하의 대 주재이신 우리가 믿는 <야훼 하나님>의 정확무오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야훼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피조물인 인생은 무릎을 꿇고 청종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이다.
그 <목사가 수도원 만드는 것>을 누가 말리겠는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만들 수 있겠으나 성경은 중세의 수도원 같은 seclusion(은둔)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다하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더 원하신다. 수년 전 중앙일보 종교란에 게재되었던 재미있는 기사가 생각난다. 한국의 합동측 (합동측에는 교단이 많다) 의 어느 교단에 속한 목사가 여자 전도사 몇 명과 같이 충북 "보은" 근방 산속에 "나살원"이라는 "수도원"을 만들어 산속에서 기도하며 성경 보며 마치 옛날 사해(死海) 서북편 Qumran 지방의 Essenes 족처럼 수도생활 한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필자는 중앙일보의 그 기사 작성자에게 e-mail로 사실을 확인한 결과 "목사님, 그것이 이단의 무리라면 기사화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기사는 한국의 정통인 합동측 교파에서 일어난 사건이라서 기사화 한 것입니다" 라고 하는 답신을 받고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해 가는구나! 종교개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던 노력은 어디가고 다시 천주교를 모방하다니... 쓴 웃음을 지은 일이 있다.
<목사가 특권화 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란 그 목사의 말씀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목사가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오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분들, 진리이신 주님 이외에 다른 어느 종교도 관심이 없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영이 하나님에게 속했는가 시험하여 보고 믿으라"(요일 4:1)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 요리문답서> 제56문에 적힌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며 경종을 울린다:
제56문 질문: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3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제56문 대답: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3계명을 지키라 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죄를 지으면 사람의 형벌은 면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형벌은 절대로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 목사의 가르침은 절대로 본받고 싶지 않다. 그의 신학이 개혁주의 정통신학으로 돌아와서 오늘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헬라어에서 회개한다는 단어인 metanoeo라는 단어는 "생각이 바뀐다"는 말이고, 히브리어의 "shub"라는 말은 "가던 길을 U turn하여 되돌아온다" 라는 의미이다. 이런 변화가 그 목사에게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아주 놀라운 것은 인터넷 Google을 검색한 결과 그 목사의 이 이색적 인터뷰 기사에 대해 이견(異見)을 말한 사람은 목사나 평신도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흘러가는 방향을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한국의 기독교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1521년 꽃피는 4월 종교개혁가 Martin Luther(마틴 루터)는 Worm 성에서 자기의 주장을 모두 취소하라고 다그치는 독일 황제와 로마 교황 앞에서 "내가 주장한 말이 성경에 위배된다면 취소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Stehe Hier Ich> (Here I Stand)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돌아가는 길에 천주교 사람들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챈 Saxony의 제후인 Frederick의 지략(智略)으로 그를 Wartburg 성으로 도피시켜 그곳에서 Martin Luther로 하여금 자유로이 글을 쓰게 하고 성경도 번역하게 하여 일 년 만인 1522년에 신약성경을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이 나왔고 1534(혹자는 1536)년에는 그 유명한 Martin Luther의 신구약이 완성되었다. 그의 성경은 원어 성경 다음으로 정확하여 필자는 한글성경이나 영문성경이 모호할 때 Martin Luther의 Heilige Schrift를 참고한다. 특히 우리 성경 가운데 일부가 옛날 창세기 4:8에서 빼먹었던 가인의 말이 마틴 루터의 성경에는 들어 있어서 후세 학자들이 다시 루터의 성경처럼 그 성경구절을 고쳐놓았던 사실은 이 성경의 우수성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그 빠진 대목은 창세기 4:8 중에 Da sprach Kein zu seinem Bruder Abel "Lass uns aufs Feld gehen."란 부분이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한글 성경에서 "우리가 들로 나가자 라고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라고 되어 있는지 살펴보라. 아마 빠진 부분이 발견될 것이다. 그 빠진 부분을 Luther 의 성경에서 회복할 수 있다. 그는 요즘의 안일한 대부분의 목사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십자가의 군병>이었다. 그는 찬송가도 작사 작곡하였는데 384장 "Mighty Fortress is Our God, 내주는 강한 성이요" 이 찬송은 바로 루터가 쓰고 그가 곡을 붙인 찬송이고 바로 이 찬송가가 필자가 운영하는 "튤립 신학 연구원 / 튤립 교육선교회"의 교가 (校歌이며 주제가(主題歌) 이기도 하다. 우리 선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에는 이 찬송이 배경음악으로 들어간다. 그 찬송의 가사의 일부는 이러하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라고 3절을 끝내는데 이런 찬송시의 신앙고백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 Martin Luther는 "Stehe Hier Ich"라고 자신의 흔들림이 없는 신앙을 못 박은 것이다. 이 얼마나 멋있는가? 오늘 이런 신앙의 인물이 아쉽다. 이런 신앙의 인물들을 발굴하여 같이 개혁주의 신학을 펴나가기를 기도해온 지 20년이 흘렀건만 그런 인물은 교계에서나 신학교에서나 보이지 않는다. 진리 운동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루터의 신앙이 그리운 때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들어보라:
"나는 성경과 내 분명한 이성을 통해서 수긍하기 전에는 교황이나 공회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서로 상반되는 의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어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내 말은 취소할 수 없노라." (Philp Schaff. "History of Christian Church- Reformation"편 중에서)
우리 모두는 천주교나 불교가 아닌 위대한 종교개혁가 Martin Luther 와 John Calvin 에게서 배우자.(끝)
김명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