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열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우리가 ‘부활의 역사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자유주의자들도 부활을 믿는다고 언어적 유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부활은 역사적으로 ‘빈 무덤’을 만든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육체적 부활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부활의 역사는 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 신화(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
또,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한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451)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452)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453)
신들과 반신(半神)들의 부활은 익히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순간에 . . . 부활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야가 된 예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하였다.
역사적 연구는, [부활 상징에서] 그것의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455)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456)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제자들 자신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457)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하였다(행 1:3).
처음 보기에는, 부활하신 주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 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에 대한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적 반박>
그러나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해 자세하고 충분한 증거들을 제공한다. 또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보이셨다고 말한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하다니 성경을 거꾸로 읽는 자들이다!
또 그 외에도 성경에서 몇 개의 중요한 구절들을 들어보자.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매우 기본적 신앙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구원받는 것을 상상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특히,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임을 증거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15:3-4). 또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의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든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5:12). 또 그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今生)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한다(15:19).
덧붙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승천과 재림의 진리와 관련된다. 만일 우리가 그의 부활의 역사성, 사실성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의 승천의 역사성과 사실성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또 그의 재림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1. 보편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열한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보편구원론적 경향을 띤다. 보편구원론이란 신자나 불신자나 결국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다는 이단적 사상이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Karl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해 모든 인간이, 심지어 가장 쓸데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형제이며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런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461)
씨 에취 다드(C. H. Dodd)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면 내적 필요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도 비슷한 사상을 보인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기독교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해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
우리는 모든 구원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에는 전 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 원리에 따르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수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이며 집중(concentration, 선택)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extra-biblical)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한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죽음에서, 예수는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러나 그를 통해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해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생명은 이미 예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할 것이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467)
창조적 사랑은 자유에서 나오며 세상에서의 자유의 긍정과 창조로 향한다. 만일 인류의 통일이--그것이 역사의 목적인데--어느 날 실상이 된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물론 예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특히 죽음에서 예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의 죽음 간의 이 교통은 예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
<성경적 반박>
그러나 보편구원론은 명백히 비성경적 이단 사상이다.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이다. 우리는 성경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궁극적 상태와 처소가 언급되어 있다. 주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셨다(마 7:13-14). 또 어떤 이가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셨다(눅 13:23-24). 최종적으로 멸망할 자들이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는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또 요한계시록은 회개치 않은 악인들은 장차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을 밝히 증거한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20:15),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
12. 사람의 영혼 불멸을 부정한다.
열두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 사상의 유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不滅性)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
불멸성(不滅性)이라는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기독교는 그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 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성경적 반박>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을 밝히 증거한다. 사람의 영혼의 불멸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묘사이다. 성경은 사람의 죽음을 영혼이 몸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으로 묘사한다(전 3:20-21; 12:7). 또 성경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조상들에게로 돌아갔다"고 묘사한다(창 15:15; 25:8). 이것은 육체적 죽음 후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증거한다.
둘째는, 사람의 죽은 후 상태에 관한 말씀이다. 시편 73:24은 성도가 죽은 후 영광 중에 영접될 것을 말한다. 주께서는 회개한 강도가 죽은 후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다(눅 23:43). 특히, 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 문제에 대해 잘 증거한다. 16:22-23,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셋째는, 부활에 관한 말씀이다. 성경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의인들과 악인들의 부활을 믿는다고 증거하였다(행 24:15). 죽은 자들의 부활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다.
넷째는, 심판에 관한 말씀이다. 악인에 대한 심판은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