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김명도 교수)
사람들은 <개혁주의 신앙>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가끔 신문에 <교회를 새로 개척한다>는 광고를 보는데, <신앙 노선이 개혁주의>라고 하여 예배에 참석해 보면, 설교나 예배 양식이나 간에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 개혁주의 신학이 좋다는 말만 들었을 뿐, 실제로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단지 남에게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이런 속임수를 쓰는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다. 목회자는 진리를 바로 분변하여 자신을 부끄럼 없는 하나님의 종으로 드려야 한다. 바로 배우고, 바로 살고, 바로 남에게 전해야 한다. 먼 훗날, 이 땅의 장막 생활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날이 반드시 오는데, 그 날 하나님에게 대답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 옛날 Scotland 의 언약파들(Covenanters)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사역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우선 <개혁주의 신앙>이 아닌 것부터 말해 보자. 다음과 같은 신앙노선은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첫째, <예수를 믿으면 무병장수하고 만사형통하며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기복주의+번영신학)
이런 가르침은 <health-wealth gospel> 이라고 불리는데, 요즘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마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것으로 착각한다. 예수를 믿어도 이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수가 있고, 가난할 수도 있다. 칼빈의 경우는 그분이 결코 신앙이 우리들 보다 못한 분이 아니지만, 그는 5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몸에 27가지의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다. Robert Murray McCheyne 목사는 26세에 목사로 안수 받고 사역하다가 29세에 세상을 떴다. 그는 그 3년간의 사역 기간에 다른 사람이 30년 목회한 것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었다. 바울에게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육신의 가시>가 있었다. 그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 하나님에게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다. 요즘 어떤 목사들 중에는 <우리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병에 걸리거나 가난하게 사는 이유는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성도들을 속인다. 바울이나 Calvin이나 McCheyne 목사 등이 우리보다 믿음이 약한 분이어서 세상을 일찍 떠났는가? 요즘 Kenneth Copeland, Charles Cabbs, Napoleon Hill 등이 이런 소위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을 섞어놓은 듯한 <health-wealth gospel> 을 가르치는 분들이다.
둘째,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생활은 적당히 하면 된다>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교리경시주의+적당주의)
우선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믿는다, Credo>란 말이 무슨 뜻인가? 믿음을 논할 때는 <믿는 대상>, <믿는 내용>, <믿는 방법>, 그리고 <믿는 이유> 등이 확실해야 하는데, 목적도 믿는 대상도 뚜렷이 알지 못하고, 믿는 내용(교리)도 모르고, 믿는 방법(기독교 윤리학)과 믿는 이유(변증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교회만 기계적으로 출석하여 <주일을 성수했다>고 자부한다.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어떻든 <믿기만 하고 그 다음은 적당히 생활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성경과 정반대가 된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믿는 내용은 기독교 교리이다. 기독교 교리를 알면 우리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스스로 자명해 진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기독교계에는 바른 신앙고백서를 체계 있게 가르치는 교회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요리문답, 이를테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대·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을 제대로 교육하는 교회가 몇이나 되는가? 교인들이 무식하기 때문에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창궐하고 이단에게 속아 넘어간다.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니, 예수를 믿는 방법인 기독교 윤리도 모른다. 따라서 믿는 바를 남에게 대답할 수 있는 지식(변증학)이 없으니 이단들과 싸울 때도 힘이 없고,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맹목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자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process) 이 정체되어 있다는 뜻이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우선 우리가 믿는 바를 알아야 한다. 어떤 목사들은 "교리를 따지지 말고 믿어라"라고 가르친다. 크게 잘못된 것이다. 믿는 대상도, 내용도, 방법도, 이유도 모르면서 <믿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기독교는 아무렇게나 믿는 종교가 아니며, 동시에 아무렇게나 적당히 생활하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했다는 말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대상과 믿음의 내용, 믿음의 방법 및 믿음의 이유 등이 모두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적당히 생활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로지 <사이비 신자들>만 그렇게 알고 그렇게 생활한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게 해주지만, 일단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율법으로 되돌려 주어 율법을 지키게 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얻었으니 생활규범(norm)으로서의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시편 119:105). 율법의 세 가지 목적은, 1.우리로 하여금 죄인 것을 깨닫게 하고, 2.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고, 3. 우리가 살아갈 생활의 규범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의 종이 되었다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하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죄의 종 노릇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님의 계명을 지켜 생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고 요한복음 14장 23절 이하에 여러 번 말하고 있고, 요한일서 5:2에도, 요한2서 6절에도 같은 말들이 되풀이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생활을 적당히 해도 된다는 가르침은 절대로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생활하는 목사나 장로나 전도사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