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 역사적 후원
16세기 종교 개혁은 20세기 근본주의 운동의 모본이 된다. 일반적으로 권징은 회개치 않는 범죄자를 교회로부터 배제하는 행위이지만,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에는 서방 교회 즉 천주교회가 전체적으로 변질, 부패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은 그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분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종교 개혁 운동은 분파 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패된 교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악한 일이다.
20세기 기독교계의 상황은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보다 더 어둡고 혼란스럽다. 역사적 대교단들은 자유화 되었거나 자유주의를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다. 다수의 교회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권징하거나 출교시킬 의사가 전혀 없다. 그리고 보수적인 교회들도 자유적 혹은 포용적 교회들과 점점 더 자유로이 교제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참된 성도들과 목사들은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회들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들의 속한 교회들이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 자신들만 보수적으로 믿으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마땅히 그 교회들로부터 나와야 하고 그런 잘못된 교제와 협력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분파주의적 관념이 아니고 성경이 명령하는, 그리고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정당한 분리이다. 참된 성도들이 죽은 교회, 배교적인 교회로부터 떠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며 또한 의무이다.
침례교 연맹의 교리적 탈선들을 지적하면서 1887년 그 단체로부터 탈퇴했던 촬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은 말하기를, "나는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했고, 그 독특한 내용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증거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앙이 잘못된 자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그들과 교제하는 자들로부터 내 자신을 분명하게 단절시켰다," "오류가 확립되었음을 내가 보았거나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심사 숙고하지 않았고, 즉시 그 단체와 결별했다. 그때 이후 나의 한가지 조언은 '그들로부터 나오라'는 것이었다," "오류에 연루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서 그 오류를 성공적으로 저항할 능력을 취하여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William E. Ash- 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p. 44; 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5일).
유명한 캠벨 모간 목사도 잘못된 관용이 선한 영향력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신 행위인 관용이 있다. 마비 상태를 낳는 화평이 있다. 교회가 일을 할 때 타협에 근거한 교제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들이 있다. 그렇게 떨어져 서 있는 것은 추방과 핍박을 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능력과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다. . . . 오늘날 교회는 타협에 의하여 그 자신의 영향력을 파괴시켰다"(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5일).
20세기 미국 북장로교회의 배교에 대항하여 싸웠던 보수적 지도자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메이천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한가지 사실이 완전히 명백하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자유주의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은 여하튼 완전히 분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그러하다면, 자유주의와 기독교가 계속 동일한 조직체 안에서 전파된다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 안에 있는 그 두 부류들의 분리는 이 시대의 절실한 요구이다"(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lism, p. 160).
그는 배교적인 교회로부터의 분리의 정당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의 기관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은 그 교회의 활동을 계속 후원할 수 없을 것이다. . . .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를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위의 책, 166쪽). 메이천은 신복음주의적 타협의 죄에 대해,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다음, 기독교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Ashbrook, p. 45).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죤 머리는,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신복음주의적 전도 방법에 관하여, 자유주의자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전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전도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분명하게 비평하였다(John Murray, "Cooperation in Evangelism,"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I, 161- 62). 또한 그는 신자의 교회 소속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소속한 교회의 집단적 증거는 곧 우리의 증거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신실한 교회에 소속해야 한다고 말했고, 집단적 관계와 책임을 무시하는 것은 악이라고 부언하였다("Corporate Responsibility," ibid., pp. 273-79).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이었던 코넬리우스 반틸은 신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약점들, 타협적 전도 활동, 및 신복음주의적 잡지들을 비평했다(Cornelius Van Til, The New Evangeli- calism). 예를 들어, 그는 타협적 전도 활동을 반대하는 메이천의 입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메이천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과 협력함으로 이루어지는 협력 선교, 협력 전파, 협력 전도를 반대했다. 메이천에게 있어서 그러한 협력은, 유대주의자들과의 협력이 바울 사도에게 불가능했던 것처럼 불가능하였다. . . . 그는 그 자신의 교회에서 선교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독립 선교부를 조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그는 협력 전도의 개념이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의 배신임을 명백히 했다"(Ibid., pp. 23, 24, 28).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 교수이었던 에드워드 영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문제에 대하여, 신복음주의가 전도와 학문과 교육을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사실, 그것[신복음주의]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위한 활기찬 투쟁의 필요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강조한다. . . . 그러면 신복음주의가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해답인가? 우리는 아니라고, 강조해서 아니라고 대답한다. 여기에 한 일시적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빨리 지나갈수록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하다. . . . 근본주의 안에는 훌륭한 많은 점들이 있고, 만일 우리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를 당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주저도 없이 근본주의를 택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신앙의 변호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관심은 참으로 성경적이다. . . . 그것[근본주의]은 실수들을 범했으나, 외쳐야 할 적절한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저 조심성 있는 중도파들이 범한 것과 같은 그렇게 큰 실수는 아니었다"(E. J. Young, "Where Are We Going?" The Presbyterian Guardian, 10 April 1959, pp. 187, 188).
훌륭한 기독교 신학자요 변증가인 고든 클락은 배교적인 교회로부터의 탈퇴의 역사적 정당성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모든 교회들은 약간씩은 다 허물이 있으므로 교적을 바꾸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하는 그럴 듯한 변론은 루터와 칼빈 또는 청교도들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았던 변론이다. 방종한 촬스 2세가 반기독교적인 법령을 제정하여 강요한 까닭에 약 2000명의 목사들이 1660년 영국 국교를 탈퇴했던 것을 기억하라. 이렇게 탈퇴함으로 해서 그들은 생활비를 받을 수가 없게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 . . 금일에 적은 형벌이라도 기꺼이 받고자 하는 목사들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 그리고 약간의 방해 외에는 전혀 아무런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과연 평신도 중에 몇명이나 배교적인 조직체를 탈퇴할 만한 확신들을 갖고 있을까?" (Gorden H. Clark,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291쪽).
김효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