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미래에는 장소로서의
천국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거기에는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저주도 없으며 하나님
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계 21:3-4).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으며 계속해서 확장, 발전되어 가고 있다(마 11:12). 아직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
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
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신학자들 가운데는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 둘 중의 어느 한쪽 면만을 강조하
고 다른 면을 무시하거나 부인한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만을 철저히 고집한
사람의 대표자는 보통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라고 알려져 있는데,20) 그는 예수님 자신도 하
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믿고 살다가 오지 않자 좌절하여 결국 십자가를 지고 말
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소위 ‘철저종말론
(consequent or consistent eschatology)’이라고 불린다. 이에 반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만을 강조하는 대표적 견해로는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실존론적 해석
(existential interpretation)’과 C. H. 다드(Do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과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실현된 것, 또는 되어 가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미래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래서 위와 같은 일면적 치우침을 지양하고 양쪽 측면을 다 강조하는 견해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스위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견해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 곧 ‘이미 [성취됨]’과 미래적 측면 곧 ‘아직 아니 [완성됨]’ 사이의 ‘긴장’을 강조하는 학설로서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으며, 또한 한국에서도 대개 ‘(가장) 올바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견해의 장점은 하나님 나라의 양 측면을 다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둘 사이의 관계를 ‘긴장’으로 본 점이다. 쿨만 자신도 여기서 ‘긴장’이 이 문제에 대한 자기의 구도에서 가장 특징적임을 말하였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과연 그렇게 긴장적 관계에 있는 것일까? 동일
한 예수께서 ‘왕’으로 계시며 동일한 사람들이 ‘백성’으로 있으며, 동일한 ‘원리’에 의해 통
치되며 유지되는데 ‘긴장’이라기보다 오히려 ‘조화’의 관계가 아닐까? Schweitzer의 연구 결과는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는 과격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직
예수의 영적 감화력 정도이다. 그의 다음 말들을 참조하라: “The Jesus of Nazareth who came forward publicly as the messiah, who preached the ethic of the Kingdom of God, who founded the Kingdom of Heaven upon earth, and died to give His work its final consecration, never had any existence.”; “Jesus means something to our world because a mighty spiritual force streams forth from Him and flows through our time also.”; “Jesus as a concrete historical personality remains a stranger to our time, but His spirit, which lies hidden in His words, is known in simplicity, and its influence is direct.”
예를 들자면 H. Ridderbos의 Paulus(1966)란 책의 기본 구도도 기본적으로 O. Cullmann의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구도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Ridderbos는 자신의 해석 방법이 ‘구속사적 해석’이라 규정짓고, 이는 예를 들자면 O. Cullmann의 Christus und die Zeit에 ‘매우 전형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이 방법의 장점으로는 첫째, ‘성취의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과 둘째로, 바울 종말론의 핵심 요소인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의 ‘상호 의존’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Ridderbos가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나중에 지적하겠지만,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양 측면을 충분히 다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또한 땅에서도 이
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역접’이 아니라 ‘순
접’의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의 하나님 나라 안에는 긴장과 갈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미 성취됨과 아직 아니 완성
됨 사이의 긴장’ 또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 사이에, 그리고 ‘현재’와 ‘미래’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둘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긴장과 갈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두 측면 자체에는 어디까지나 ‘조화(調和)’와 ‘순연(順然)’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실현된 구원과 앞으로 실현될 구원의 관계에 대해서도 성경은 오히려
‘보증’(고후 1:22; 엡 1:14)과 ‘인침’(엡 1:13; 고후 1:22), 또는 ‘확신’(롬 8:38-39)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현재의 자녀됨과 장래의 구원을 보증해 주시고 연결시켜 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 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그러므로 우리는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린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살전 1:8)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9절)과 예수의 강림을 기다리는 ‘소망’(10절)으로 인하여 주위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사도 바울은 이 사이의 관계를 모두 ‘그리고(kaiv)’로 연결시키고 있다.
만약 우리에게 ‘긴장’이 있다면 그 주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의 긴
장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 사이의 긴장일 것이다. 선하고
의롭고 완전한 ‘하나님의 계명’과 그것이 선한 줄 알면서도 다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육신
의 연약함’ 사이의 갈등이다(롬 7장 참조).
뿐만 아니라 쿨만에게 있어서는 시작과 끝, 곧 창조와 종말은 모호한 것으로 희석되고 말
며 그 역사적 진실성이 의심되고 있다.그러다 보니 남는 것은 ‘중간’ 곧 현재성 단번에 임
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 곧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도로 이해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속단이다. 왜냐하면 헬라어의 기도문에서는 기원의 ‘단호성’, ‘간절성’ 또는 ‘결의성’(決意性, definiteness)을 나타내기 위해 아오리스트(不定時相)가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하나님 나라 사이에 동일성이 존재하듯이 신약의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 사이에도 본질적인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Cullmann은 기원과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을 ‘단지 예언’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객관적으로는 ‘단지 계시의 대상’일 따름이며, 주관적으로는 ‘단지 신앙의 대상’일 따름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역사적 증명을 통한 확증’이 없다. 이것들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실들’이 아니다.
그가 말한 아직 아니란 것도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현재의 ‘아직 아니’일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강조한 ‘긴장’ 이란 것도 사실은 현재의 ‘긴장’이니, 결국 전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이 상당히 약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쿨만의 위 구도는 성경보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적 구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마땅히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감 없이 그대로 다 인정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긴장’의 관계라기보다
는 차라리 ‘조화’의 관계이며 동질성과 공통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둘 사이엔
차이가 있다.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는 아직 주님의 통치가 온전히, 100% 이루어진 것이 아
니며 따라서 죄와 연약함이 있으며 이로 인한 고통과 갈등이 있다. 이에 반해 미래의 하나
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고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으며 죄와 고통
이 없고 갈등이 없다. 또한 현재의 하나님 나라가 미래의 하나님 나라로 넘어갈 때에 급작
스러운 불연속이 존재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현 세상은 갑작스럽게 종말을 고할 것
이며 성도들은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나 불신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이 세상은
불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확장, 발전
과 완성 사이에는 많은 동질성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