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은 마음의 부담을 느낀 한 사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부흥은 한 사람, 한 그룹의 마음의 부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기독교회의 오랜 이야기 속에 나타난 성령의 부흥 역사를 읽어 볼 때, 위대한 부흥이 일어날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일은 한 사람이나 어느 부류의 사람들이 갑자기 이러한 점을 느끼고, 자기 짐이 너무 무거워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 거기에서부터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위대한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개신교의 종교 개혁의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그 얼마나 놀라운 운동입니까? 그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 기원이 무엇입니까?
그 종교 개혁의 전조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성령의 역사에 의한 ‘마음의 부담’입니다.
교회사에 보면, 본문의 모세와 같은 사람이 계속 시대마다 등장했습니다.
존 위클리프와, 존 후스 등이 있었습니다.
위클리프는 라틴어 말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있었습니다. 후스는 위클리프와 루터의 중간 고리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라틴어 대신에 자국어인 체코어로 설교했습니다.
또한 정식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매우 평범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갑자기 이 마음의 부담과 짐을 느끼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부담감을 느끼는 딱 한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역사를 교회 안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다른 부흥의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이 점은 얼마든지 예증할 수 있습니다.
웨일즈나 미국에서도 동시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서 그 움직임이 딱 한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1857년 뉴욕시의 풀턴가에서 기도 모임을 시작한 그 사람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소명감을 느꼈고,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북아일랜드의 부흥도 딱 한 사람, 제임스 맥퀼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웨일즈에서도 역시 딱 한 사람, 험프리 존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능력을 보고 자기 나라에도 이러한 일이 있어야겠다는 마음의 강박감을 느끼고 대서양을 건너 웨일즈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교회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매우 가슴 설레는 "로맨틱"한 요소입니다. (이 말은 제가 쓰기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은 평범한 한 사람을 선택해서/감동해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의 일은 기독교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지도자들과 위대한 사람들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들어 쓰심으로써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사용하심으로 "있는 것들을 폐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그러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모세도 보면, 80세가 넘은, 세상적으로는 은퇴해야할 나이입니다.
때로는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을, 선지자들을 택하여 사용하신 것을 봅니다.
그러한 일이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습니다.
누군들 나사렛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고 기대했겠습니까?
속담이 이르듯이 나사렛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고 기대했겠습니까?
속담이 이르듯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구주가 나사렛에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인식합시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사람이 바로 ‘평범하고 무능한 당신’일 수 있습니다.
무명의 교회 성원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통로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인가 당신의 마음에 ‘강력한 부담감’을 주셨다면 기도하면서 그 일에 순종하십시오. 그 일을 착수하십시오.
마틴 로이드 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