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목회자는 좋은 질문의 가치를 안다. 교인들과의 대화가 유익한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는 당신이 던지는 질문에 달려 있다. “가정생활은 어때요?” “요즘 경건의 시간에 읽는 책이 뭡니까?” “내년 특별한 계획이 있나요?” “최근 흥미를 느끼는 게 뭡니까?”
질문은 층위를 파헤친다. 질문은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낸다. 심문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 심방이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목회자는 (혹은 장로는) 성도를 돕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알아야 한다. 좋은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과정은 더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결국 성도를 격려하고 키우는 대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때때로 목회자는 머뭇거린다. 심방은 그저 겉도는 듯 이어지고-주제들은 건성으로 언급되고 대충 논의되며, 질문은 던져졌지만 어정쩡하게 답변될 뿐-목회자는 마음이 불편하다. 핵심에 닿지 못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럴 때일수록 더 깊고 날카롭게 파고들어야 한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어떤 질문을 떠올린다. 지금까지의 공손함과 피상적인 대화를 가르고 들어갈 수 있는 진짜 질문을 찾는다.
그럼에도 그는 주저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어려운 질문이 과연 무엇을 드러낼까?
“오늘 왜 이렇게 화난 것처럼 보이지요?” “성적 유혹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부부 사이는 어때요?”
이것들은 잘 다듬어진 질문들이 아니다. 실제 순간이 되면 목회자는 더 잘 표현해야 하고, 아마도 더 신중하게 서두를 붙이며, 단순히 ‘예’나 ‘아니요’로 답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는 더 어려운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종의 직감이라고 할까 목자의 감각에 가까운 것이다.
심방하는 내내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 어렸다. 대화가 가족 이야기로 흘러가자, 그녀는 의자에 앉은 몸을 불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건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 석 달 동안 그녀는 어딘가 잘못된 기운을 풍겼다. 교회에서 볼 때마다 축 처진 어깨, 입가에서만 간신히 머물다가 사라지는 형식적인 미소, 예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차로 향하는 발걸음.
목회자는 머뭇거린다. 물어야 할까? 혹시 내가 틀리면 어쩌지? 더 두려운 건, 예감이 맞으면 어쩌지? 그의 질문이 진실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중독. 학대. 무너져 가는 믿음. 어쩌면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결혼생활.
그 다음은 무엇일까? 목회자가 예언자는 아니지만, 앞으로의 일을 내다본다. 무엇보다 수도 없이 이어질 집중적인 목양에 들어갈 시간이 눈에 보인다. 심방 그리고 계속 이어질 심방. 온 힘을 소모하게 만드는 눈물 섞인 대화와 팽팽한 긴장 속의 만남들. 어쩌면 교회 권징, 전문 상담, 혹은 1년간의 치료 과정까지 필요할지도 모른다. 묻지 않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그저 겉도는 대화와 뻔한 대답을 받아들이는 편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목자가 되려 한다면 말이다.
내 사역을 돌아보면, 목자의 감각을 따라 더 깊이 파고들고, 더 담대하게 질문하고, 어색한 침묵을 두려워하지 말았어야 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편안함과 안일함을 사랑하는 내 성향이, 마땅히 쫓아야 했던 것을 쫓지 못하게 막았다. 몇 달이 지나서, 혹은 몇 년이 지나서야 결국 드러날 게 드러나고야 말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경우에는 필요한 목회적 도움을 받은 교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너무 늦은 경우도 있었다. 물론 내가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게 더 효과가 있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질문이라도 거부될 수 있고, 아무리 사랑으로 다가가는 목자라도 완강한 벽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핵심은 이것이다. 목회자라면 차마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이 있어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불편한 질문조차도 선한 일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성찰을 불러일으키고, 고백을 이끌어내며, 도움을 구하는 외침을 낳고, 결국 복음 안에서 만나는 참된 도움으로 이끌 것이다.
어려운 질문은 더 많은 수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더 큰 은혜로 이어질 수도 있다. 더 큰 은혜를 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양들을 위해 바라는 바가 아니겠는가?
루벤 브레덴호프(Reuben Bredenhof)
Canadi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목회/선교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