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사이트는 [회원가입]을 하신 후에 내용들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회원가입 후, 하루 정도 기다리시면 정식회원으로 등록해 드리며 모든 내용을 다 보실 수 있습니다. 

사역의 특성상, 불가피한 절차임을 이해 바랍니다. 

자세한 사항은 drcharleshong@gmail.com 으로 문의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Shalom aleikhem !

שָׁלוֹם עֲלֵיכֶם


 auto
 
작성일 : 25-10-12 20:35
모두가 다 좋아한다고 다 바른 신학은 아니다...(1)
인쇄
 글쓴이 : 창암
조회 : 393  

C. S. 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순전한 기독교」, 「스쿠프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 등으로 유명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C S 루이스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잘 알것입니다. 하지만 C S 루이스를 순진하게만 봐서는 안됩니다. 그의 사상에는 적지 않은 많은 문제들,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큰 문제들이 있습니다.

아래는 C.S. 루이스의 글을 통해서 그가 과연 어떤 생각과 신학과 사상을 가진 사람인지를 말하고 있는 호레이스 목사님의 글[C.S.Lewis의 글에 드러나는 (신)플라톤주의]입니다.

글에서 나타난 C.S 루이스의 심각한 문제들을 대충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은 내용입니다.

C.S. 루이스는...

1.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한다.(요나서, 욥기서, 에스더서가 역사가 아닌 소설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함.)

2. 그의 신학적 입장은 신복음주의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복음주의는 전통적인 복음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적인 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3. 불트만의 비신화화를 비판하지만 실상은 성경의 신화를 아니며, 신화에 대한 독특하고 애매모호하며 이상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4. 계시관에 있어서 문제점 - 그는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아닌 다른 것(6가지)이며, 성경은 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5. 플라톤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6. 기독론에 있어서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관점이 성경적이지 않다.

7. 뉴에이지적인 보편적 양심(자신 안, 물질 안, 그림자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참된 실재(reality)로서의 영원한 세계를 경험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한)이 있음을 주장한다.

8. 뉴에이지적인 신화론(이방 종교의 신화도 기독교의 신화와 일맥하며,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을 주장한다.

9. 이방 종교도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본다. 단지 형식이 잘못됐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10. 누미너스라는 모호한 이교적 체험을 기독교적인 체험인 것으로 말하며, 누미너스의 체험이 중생한 자의 것과 비중생자의 것이 서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11. 그가 말하는 계시의 증빙 및 표현 수단인 열망(Sehnsucht)은 기독교복음의 위장된 에로스의 표출에 불과 하다.

12. 기독론(성육신)에 대한 왜곡된 이단적 주장을 하고 있다. - 그가 가지고 있던 플라톤주의적 세계관의 바탕으로 성육신, 예수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13. 하나님은 다른 세계들(worlds, 복수임에 유의할 것)에 또 다른 몸들(bodies)이 있다고 믿는다는 이상한 발언을 함.

14. 타종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없고, 비판을 하더라도 너무 부드럽게만 말한다. 그래서 두루 인기가 있음.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이어지는 본론을 살펴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C.S.Lewis

- 현대교회의 선지자인가? 아니면 현대교회를 와해시키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인가? 그의 책 스쿠르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간부마귀(Screwtape)가 부하마귀 (Wormwood)에게 어떻게 하면 인간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며, 구원받은 영혼이라도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타락시킬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귀띰해 주고 있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C.S.Lewis가 현대교회를 와해시킬 지도 모르는, “트로이의 목마”일 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음해이고 모독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간부마귀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런 간부마귀의 글을 상상해 내고 있는 C.S.Lewis의 그 생각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An important spiritual law is here involved. I have explained that you can weaken his prayers by diverting his attention from the Enemy Himself to his own states of mind about the Enemy.” 인간(이나 크리스챤)의 입장에서 이 조언을 해석하자면, 하나님(the Enemy) 그 분 자신에게서 관심을 돌려 그 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마음, 어떤 심리,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는 우리 인간 자신의 감정과 느낌, 혹은 믿음의 정도 등에 대해서 신경을 쓰도록 유혹하면 인간의 영혼은 약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C.S.Lewis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게 인간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주의하지 말고 바로 하나님 그 분에게 초점을 맞추라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조언을 루이스 자신이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그의 감정, 곧 신을 향한 열정(Sehnsucht)에 정당한 선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 그의 하나님 그 분에게서 집중시켜야 할 그것에서 시선을 돌려서 자신의 그런 감정과 느낌에 신경을 지나치게 써서 그의 작품활동들은 하지 않았을까? 어쩜, 이런 비판을 그의 글에 적용시켜서 해부하는 것은 너무 엄격한 일인 지도 모른다. 어쩜, 스쿠르테이프의 또 다른 조언인, 그리스도인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것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보다도 그의 글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면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을 받을 수 있고, 어쩜 비판되어야 할 요소가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로서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그의 글을 비평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아니요, 어쩜,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인지도 모르겠다. 변명이 아니길 스스로에게 바란다.

더욱이나, 그의 글들이 전혀 비판 없이(사실, 어느 정도 비판되고 있는 지 몰라서 하는 얘기이다) 수용되고 있는 현하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이런 비판이 하나 정도, 아니, 균형 잡을 만큼 개진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마땅히 싸워야 할 그 싸움이 아닐까?(고린도후서10:4-5). C.S.Lewis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그 분 앞에서 초라한 미물일 뿐이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그리고, C.S.Lewis도… (이 글은 홀리죠이의 부탁에 의해서 C.S.Lewis의 사상에 대한 비평적 조감도를 그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2. C.S.Lewis와 나

우리 나라에서 C.S.Lewis가 소개된 것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부터일 것이다. 아마도 전남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김목사가 문학공부를 하는 중에 그 문학을 신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터이고, 그러다가 옥스포드대학에서 중세시대의 영문학에 조예가 있었던 영문학교수로 연구생활과 문학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C.S.Lewis에 대해서 듣게 되었을 것은 어쩜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그가 신앙의 회의를 극복하면서 적어내는 기독교변증적인 저서들은 김준곤목사의 신앙에 확신을 심어주는데 일조하였음에 분명하다. 필자가 국내에서 대학생활과 신학수업을 받던 중에는 간혹 외국에서 공부한 분들이 설교 중에나 글을 통해서 C.S.Lewis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이 없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여겨 왔었었다. 간혹 Lewis의 글에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는 데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언급해 주는 사람도 전혀 없었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채로 영국에 오게 된 것이 1997년이니까 바로 다음 해 1998년에 있었던 영국내에서의 C.S.Lewis의 탄생 100주년기념행사들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었다.

그래서 계획 하나를 세웠다. C.S.Lewis에 대해서 나름대로 연구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앞으로 하게 될 공부와는 별도로 영국에서의 유학의 부산물로 하게 되는 이런 연구는 보람된 것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먼저, 그의 책들을 구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책들은 이곳의 채리티 숍이나 헌 책방 같은 곳에서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나니아 시리즈)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녀들의 영어공부를 위해서 그 책들을 모두 읽게 하였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Out of the Silent Planet, Perlandra(Voyage to Venus), That Hideous Strength]가 있는 것도 발견하였다. 쉬운 것만은 아니었지만, 모두 탐독하였다. 신앙과 관련된 책자들이 있는 것도 발견하였다. Mere Christianity를 읽고 The Problem of Pain등을 읽은 것은 당연하였다. 그 외의 그의 책들(Miracles나 Beyond Christianity 등)을 탐독하고, 그의 자서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의 글들을 이런 저런 주제들을 따라서 편집한 책(예, C.S.Lewis on scripture)들을 구하고 그의 문학과 신학사상들을 평하고 있는 책자들을 입수하여 읽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수집해 놓은 그의 책, 그에 관한 책들 모두가 50여권이 넘는다.

하지만 궁금하게 여겨왔던 것은, 그의 글들이 “역사적 전통적 칼빈주의신학”의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글들에 대해서 거의 찬양일색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상한 부분이 자꾸만 드러나는 것을 느끼면서 그런 궁금증은 더하여져 갔다. 계속 비판적 관심을 갖고 그의 책들과 관련된 글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탄생기념 100주년이 되던 해에 입수하게 된 글이, Tony Baxter란 사람의 “The enigma of C.S.Lewis”라는 글이었다(The Journal of the Christian Research Network, winter 1998, issue 4, pp.30-31).

그의 글의 논지는, 첫째, 복음주의자들과 로마캐톨릭 연합운동에 C.S.Lewis의 글들(Billy Graham의 신학과 함께)이 그 중심축에 놓여 있다는 것, 천주교인들도 개신교인들과 똑같이 C.S.Lewis의 글에 대해서 대환영이라는 것, 그리고 셋째, Christianity Today나 Alpha Course같은 프로그램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애호되고 있는 작가라는 것이 그의 enigma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짧기도 했고, 그렇게 설득력이 없었다. 로마캐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운동 그 자체에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학적인 설득이었었다.

한 편으로는 C.S.Lewis의 책들을 읽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신학을 비평하는 자료들을 찾아가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순례였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흉내내면서도, 천로역정의 “기독도”가 “천국”을 향해서 “순례”를 하는 것과는 달리, C.S.Lewis의 정신적 탐구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The Pilgrim’s Regress”라는 소설은, 일종의 “순례”를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류의 “순례”이고 그 모티브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번연의 “순례”는 “장망성”으로부터 “천국”을 향한 직선적 순례라고 한다면, 루이스의 “순례”는 “장망성”으로부터 다시 “장망성”으로 되돌아오는 그러면서 그 “장망성”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순환적 순례라고나 할까….존번연의 순례의 신앙적 의미와는 다른 일종의 인식론적 순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개의 순례를 대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자가 다르기 때문에, 스타일이나 강조점들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본질적”인 어떤 “차이”를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꼭 꼬집어 내어서 표현하기가 어려웠던 셈이다.

그러면서 그의 문학과 신앙활동의 중심모티브로서 작용하는 것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Joy(즐거움)이고 Sehnsucht(열망)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것은 1974년에 발간되고 다시 1997년에 재발간된 C.S.Carnell이라는 사람의 Bright Shadow of Reality: Spiritual Longing in C.S.Lewis(Wm.B.Eerdmans 출간)라는 책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지금도, C.S.Lewis와 관련된 책, Audo/Video 테이프들을 만나게 되면, 누구보다도 반가워하면서 구입을 하고 있는 필자이다. 그러면서, 아래에 제기하는 몇 가지 문제점들로 인해서 그의 책들과 사상들에 대해서 경계해야 할 것을 또한 말하고 싶다. 이런 견해에 이르게 된 일련의 과정을 잠시 먼저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3. C.S.Lewis사상의 비평적 이해를 위한 조감도

가. 근본주의와 모더니즘의 중간쯤

영문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의 문학이론은 “신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쯤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황무지>등의 시로 유명한 T.S.Eliot 등의 “신비평”이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면서 그 이전의 낭만주의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취하여고 하는 것을 보아서 그렇다고 평할 수가 있다. 그의 유럽중세영문학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이런 견해를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그의 문학이론은 사실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에 깊히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의 신학사상에 초점을 맞춰서 비평하기로 한다.

한 마디로 그의 신학사상은 근본주의도 아니고, 모더니즘(현대주의)도 아니라고 해야겠다. 먼저, 그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은, 1953년에 Corbin Carnell이라는 사람에게 쓴 요나서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분명해 진다: “…the whole Book of Jonah has to me the air of being a moral romance, a quite different kind of thing from, say, the account of King David or the New Testament narratives, not pegged, like them, into any historical situation”(quoted in Christensen, C.S.Lewis on scripture, pp.104-5). 요나서는 역사서와는 전혀 다른 일종의 소설이라고 하는 얘기다. 영문학자로서, 성경의 기록을 일종의 문학서로 보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기록을 역사와 무관한 소설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이런 견해는 1959년에 표현된 그의 견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는 이때 캠브릿지 대학생들에게 행한 강의 중에서 요나서는 유대인의 유머감각을 곁들인 “a fictional story”라고 단언한다(Fern-Seed and Elephants, p.108). 이런 그의 견해는 욥기나 에스더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Lewis on scripture, pp.106-7).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유주의(modernism)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가 성경을 문학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인간적인 저작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거룩함과 경건함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일종의 a sacred text인 셈이다. 이런 입장에 견지해서 그는 불트만의 비신화화신학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이론은, “신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당하게 비판하지 못한 것이라고 C.S.Lewis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 대해서 루이스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다른 항목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루이스에게 있어서는 최소한 예수의 “신화”는 “신화중의 신화”로서 “사실”이라는 것이다. “신화중의 신화”? – 참 묘한 표현이다. 하지만, 불트만이 성경에서 기록된 예수의 기적조차 “신화”로 묘사하는 것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니, 루이스의 예수의 기적이, 그리고 예수라는 인물이 “신화 중의 신화”라는 견해는 무언가 좀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강 이 정도 해두어야 계속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

C.S.Lewis는 회심 이후 평생토록 “기적”을 믿어왔다. 그래서 <Miracles>라는 책까지 썼다. 그의 아내 Joy의 죽음 앞에서 이것에 대해서 잠시 회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을 그의 책에서 보여주는 바도 있지만, 그의 공식적인 견해는 그래도 여전히 기적을 믿는 초자연주의자였다. 기적이 없다고 하는 자연주의에 반대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초자연주의는 성경적인 초자연주의라고 하기에는 좀 묘하다.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환상적 세계”로서의 초자연세계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요정과 귀신들, 영계의 존재들과 인간세계가 어우러져 있는 것이 그의 작품세계이고(나니아의 “환상”세계를 생각해 보라!), 이런 작품세계는 중세의 기사와 영웅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낭만주의”와도 연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19세기의 자유주의신학자인 Ritschl이나 Stauss, 그리고 20세기의 Harnack같은 이들을 비판한다. 성경의 초자연주의를 변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쩜 자신의 작품세계를 변호하기 위해서 성경의 초자연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가짐직하다.

하여튼 그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의 견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비판을 좀 더 들어보자.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7,994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7694 "제발 오지 말아 달라".. 창암 10-16 408
7693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16 373
7692 선교는 내가 아닌, 현지인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일이다. 창암 10-15 373
7691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15 367
7690 모두가 다 좋아한다고 다 바른 신학은 아니다...(최종) 창암 10-14 381
7689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14 469
7688 모두가 다 좋아한다고 다 바른 신학은 아니다...(2) 창암 10-13 449
7687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13 380
7686 모두가 다 좋아한다고 다 바른 신학은 아니다...(1) 창암 10-12 394
7685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12 364
7684 인성교육만 시키다 자녀가 죽어버리면 그 아이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입… 창암 10-10 378
7683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10 364
7682 단 한 명의 성도가 남아 있어도 희망은 있습니다.” 창암 10-09 406
7681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09 417
7680 어떻게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악을 그대로 두실 수 있을… 창암 10-08 400
7679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08 385
7678 중국 정부가 종교인의 온라인 활동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에 나섰다. 창암 10-07 408
7677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07 387
7676 가족 전도가 가장 어려운거 압니다. 창암 10-06 389
7675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06 353
7674 목회자는 이렇게 교회를 파고 들어오는 사상과 영적운동을 분별해야 한다. 창암 10-06 385
7673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06 376
7672 컴퓨터 앞에 앉아서 스스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신자들이 많… 창암 10-03 450
7671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03 425
7670 컴퓨터 앞에 앉아서 스스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신자들이 많이 … 창암 10-02 479
7669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02 387
7668 오늘날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송하는 실상은 참으로 신앙적이지… 창암 10-01 411
7667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10-01 394
7666 교부들에게 배우는 목회 창암 09-29 415
7665 강단이 개혁되어야 산다 창암 09-28 386
7664 스펄젼과 함께 하는 아침묵상 창암 09-28 384
7663 무엇이 진실이냐 거짓이냐 하는 문제보다 자신의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이 … 창암 09-26 460
766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09-26 433
7661 2인자 혹은 더 낮은 평가를 받더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자”로 평… 창암 09-25 424
766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09-25 382
7659 중국, 미등록 가정교회 탄압 저장성 목사‘불법 영업’혐의로 체포 창암 09-24 413
765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09-24 382
7657 목회자는 (혹은 장로는) 성도를 돕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더 알아야 한다. 창암 09-23 404
765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09-23 510
7655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세 가지 방법 창암 09-22 418
765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09-22 367
7653 영적 교만의 표시.. 창암 09-21 409
765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09-21 406
7651 신령한 양식을 먹고 싶은 욕구와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창암 09-19 377
765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09-19 405
7649 오늘 교회가 캘빈의 목회로부터 이런 것들을 좀 더 배우면 좋겠다고 소망해… 창암 09-18 431
764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09-18 387
7647 말씀을 믿고 싶은대로 왜곡하지 마라... 창암 09-17 430
764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 창암 09-17 379
764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오늘만을 주셨다.. 창암 09-16 41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