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그의 어중간한 견해에 대해서 비판의 메스를 댄 사람이 있다. 뜻밖에도 그는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써서 장안의 지가를 올렸던 바로 J.A.Robinson이다.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는 루이스의 바로 사영리식 논리를 비판한다. 사영리식 논리란, 곧 예수의 신성에 대한 논증으로서 사영리 전도법을 제창한 빌브라이트가 이용하는 방식인데, 그 논리방식을 제창한 사람들 중에 제기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C.S.Lewis로서 <Mere Christianity>에서이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는데, 만일 그런 주장이 거짓이어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는 분명히, 미친 사람이든지, 종교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미친 사람이 아니고, 또한 종교 사기꾼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자신이 주장한 그 주장대로 하나님이시라는 논리이다.
이런 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조감도에서 요약하는 바는, 그의 신학은 근본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중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속해 있었던 영국국교인 성공회의 신학적 입장과 어쩌면 아주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신학적 입장을 “균형잡힌 신학”으로 평가하느냐 아니면, “어중간한 신학”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평가가 엇갈려질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런 그의 견해를 필자는 “신복음주의”신학으로 규정한다.
이런 규정을 좀 더 이해하려면 솔직히 “신복음주의”와 “복음주의”간의 논쟁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논쟁을 이해하려면 또 다른 글 한 편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선 정말 말 그대로 간단히 몇 자로 스케치해 본다. 먼저, 미국의 신학적 상황 속에서 프린스톤신학교가 좌경화되는 것에 반기를 들고 G. Machen등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운 것이 1930년대. 이것에 대해서 그러한 입장을 “근본주의”로 평가하고는 그들이 평가한 “근본주의”가 지향하고 있는 “복음주의”라는 것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복음주의”라는 뜻으로서의 “신복음주의”를 제창하는 사람은 바로 보스턴제일장로교회의 목사였던 오켕카이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 칼 헨리, 챨스 풀러 등과 더불어서 풀러신학교를 세운 것이 바로 1940년대. 우리나라로서는 아직 일제시대의 어두움 속에 휩싸여 있던 핍박의 세월이었었다. 옥중성도들의 신앙의 절개를 위해서 목숨을 담보로 싸우고 있었던 그 세월.
루이스가 있었던 영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루이스가 기독교변증가로서 작품 활동을 하던 1930년 어간부터 혜성같이 등장한 설교자가 바로 로이드 존스 목사,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Bash Camp로 불리어지는 존 스토트 목사의 활동은 나락으로 전락되어가던 영국복음주의교회에 일종의 영양제주사를 놓아주었다고나 할까. 이제 지성인도 보수적인 기독교인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준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 당시 미국의 빌리그래함의 전도대회가 런던 등에서 개최가 되고, 영국의 보수적인 신앙인들과의 연계 속에서 활동하기를 원했던 그 당시의 바람들이 결합이 되어서 세워지는 신학교가 바로 “런던바이블칼리지”(1944년개교,현재의 이름은 London School of Theology)이다. 문제는 이들이 “근본주의”에 대항해서 일어나게 된 “신복음주의운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흐름에서 결국 빠져나오게 되고, 독자적인 노선을 선포하는데(1970 년대 초에 London Theological Seminary설립), 이것을 전후로 해서 존스토트목사와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은 이미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런 중에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복음주의”라는 신학적 선언에서 “신”자를 빼어버리게 된다. “신”정통주의 등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염두에 두었던 셈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근본주의”자들로 규정한 그 사람들의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자신들도 채용하게 되면서,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개념에는 큰 혼동이 오게된다. 이런 혼동에는 사실, 미국에서의 “신복음주의자들”의 약진이 야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G.M.Marsden이 쓴 Reforming Fundamentalism(Wm.Eerdmans, 1987)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는 C.S.Lewis의 신학적 입장은 바로 이런 “신복음주의적 신학적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에서는 “런던바이블칼리지”계열에서는 C.S.Lewis의 입장이 거의 비판 없이 소개되고 있고, 로이드 존스 목사의 신학입장에 더욱 공감하는 사람들은 C.S.Lewis의 입장에 대해서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영국의 C.S.Lewis의 책자들을 소개하는데 앞장섰던 학교가 바로 Wheaton College이다. 1960년대에 루이스가 미국에 대대적으로 소개되는데, 이 학교가 앞장 섰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당시 휫튼 칼리지는, 여전히 19세기말엽의 프린스톤신학과 특별히 B.B. Warfield의 신학을 자신들의 신학적 멘토들로 삼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신학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고도 할 수 있는 C.S.Lewis의 신학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학적 분별력이 해이해지는 현상을 이 당시부터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비판은 그의 계시론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나. 그의 계시론과 (신)플라톤주의
루이스는 무엇을 “계시”라고 보는가? 그의 성경에 관한 입장들을 수집해서 책으로 편집한 Christenson에 의하면, 여섯 가지의 유형의 “계시”에 대한 루이스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Mere Christianity에 의하면, 보편적인 양심, 이방세계에서 개진되어진 선한 소원들, 유대교의 선택, 그리고 성육신, 이 네 가지가 소개되고 있고,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는 “열망”(Sehnsucht)라는 것과 the numinous(이것은 어떻게 번역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R.Otto의 <The idea of Holiness>이라는 책에 자세히 이 개념이 소개되고 있다. 혹자에 의하면, 이 누미누스를 ‘idea’로 이해해서 번역하는 것은 그야말로 Otto의 누미누스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비평하기도 한다)라는 것 두 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Sehnsucht라는 것이다. 이것은 Mere Christianity에서만 아니라, The Pilgrim’s Regress에도 또 다시 등장하고 있고, 루이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들 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학자의 혀 주 : CS루이스가 계시라고 생각하는 것 ㉮ 보편적인 양심, ㉯ 이방세계에서 개진되어진 선한 소원들, ㉰ 유대교의 선택, ㉱ 성육신, ㉲ “열망”(Sehnsucht), ㉳ the numinous)
이런 “계시”의 유형에 대한 그의 입장이 보여주는 바는, “성경”을 하나님의 유일하신 자기계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이다.루이스에게 있어서 성경이란 하나님을 가리키고(pointing) 있는 계시의 여러 방편들 중의 하나이다.그렇다고 해서 예수야말로 유일하신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하는 바르트의 신학과도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의 계시이해는 우리 인간의 계시에 대한 체험(영적 조명)과 하나님에 대한 계시 그 자체와의 구분을 적절하게 시도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앞의 서론에서 지적한 것 같이, 스쿠르테이프의 자기 부하마귀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을 상상해 낼 수는 있었어도 그런 조언을 자기에게까지 적절하게 적용시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루이스가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쉬운 일임에 분명하다.
이렇게 그가 개진해 온 계시의 유형들을 하나 하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그가 지향했던 입장이 바로 철학적 관념주의(philosophical idealism)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이런 관념주의는 고전적 플라톤주의나 신플라톤주의적인 용어들을 띤 채로 그의 작품들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플라톤주의는 영국의 정신사를 조그만 고찰하게 되면, 플라톤주의가 영국적 상황에서 개진되었던 캠브릿지 플라톤주의(특별히 17세기의 헨리 모어의 철학)나 18세기의 버클리주교의 관념주의와도 연결된다는 것을 쉽게 간파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그 계시를 이해하게 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바로 루이스의 “계시론”을 이해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할까? 루이스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든지 하나님의 자유하심 같은 개념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에 유념하길 바란다. 그의 답은, 인간의 마음과 상상력에 남겨져 있는 그 흔적(물론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것이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또한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플라톤주의적인 표현을 통해서 말하자면,예수란 그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오신 일종의 플라톤적인 Demiurge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모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중요한 개념인 “Transposition”( or transvaluation)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에 대해서는 그가 스쿠르테이프의 편지 후기라고 할 수 있는 <Screwtape Proposes a Toast and Other Pieces>(London: Collins Fount Paperbacks, 1965)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책의 설명을 참고해서 간략히 여기에 소개한다.
루이스는 영적 세계의 영역이 물질적인 세계의 영역보다 더 중요한 일차적 실재(reality)라고 본다. 이 두 세계는 서로 상응하지만(coinhere), 위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영적 영역이 상위에 있다는 것이다. 곧 가치가 보다 나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서부터 플라톤주의의 냄새가 난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상위에 있는 영적 세계의 것(혹은 존재)가 하위의 것인 물질세계로 상위의 가치와 부요함을 상실하지 않은 채로 옮겨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것이 바로 transposition, 혹은 transvaluation의 문제이다. 루이스는 상위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 하위의 영역으로 어떤 가치가 <전이>(transposition)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의 “상상력”(imagination)이고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성례”(sacrament)라고 한다. 이런 성례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나니아 시리즈의 마지막 책인 the Last Battle의 마지막 부분(14장)에서 아슬란(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의 이름)이 말하기를,”Come further in! Come further up!”와 같은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적인 것이 자연적으로 변형되는 것이 “성육신”이고, 자연적인 영적인 것으로 변형된 것이 바로 “승천”인 셈이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연세계란 영적 세계의 그 실재가 희미해진 일종의 상징과 같은 것인데, 그 기원을 바로 영적 실재에 두고 있는 일종의 그림자가 된다. 나니아시리즈의 가장 마지막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그림자세계”이다. 자연세계, 물질세계를 이렇게 “그림자세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Shadowland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자세계를 벗어나서 further in, further up 해서 “이상세계”인 영적 세계로 나아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 곧 바로 나니아시리즈의 기본주제인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사상이 바로 고전적 플라톤주의의 아류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천국과 지옥을 대비시키고 있는 그의 또 다른 소설, <The Great Divorce>에서 “천국”의 실재를 묘사하기를 “solidity”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국”과 루이스가 묘사하는 “천국”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은 루이스의 작품을 이해하는 길일 뿐만 아니라, 바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