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여섯 가지 유형의 계시들
1) 보편적인 양심
서구의 철학사 중에서 헬레니즘을 플라톤주의와 그와 대별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보편적 관념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플라톤주의와는 달리 오히려 구체적인 개체를 강조한다.
자연주의적 물질주의를 배격하는 루이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혐오할 것은 당연하다. 계시를 수납할 수 있는 인간의 기능을 그는 양심이라고 보고 이런 양심이 문화를 초월해서 인간사회에 보편적이라고 한다. 이런 견해를 그는 그의 책, The Abolition of Man이라는 책에서 개진하는데, 곧 인간의 마음 속에 도덕적으로 선한 그 무엇이 내재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도”(Tao)라고 한다. 그렇다고 원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부인하지 않지만, 문제는 그것을 마땅할 만큼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안에 내재하는 그 보편적 도덕적 욕구를 강조한다. Mere Christianity의 아주 중요한 논지가 바로 이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보편적 윤리감각이 발현된 결과가 바로 “종교”라고 한다. 그의 종교이론이 성경의 계시에 근거한 종교(기독교)와는 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보편적 양심이 활동해서 “종교”를 발생시킬 가능성에 대한 인정… 이것은 플라톤이 강조하고 있는 동굴 속의 인간이 그림자를 보고는 동굴 밖을 상상하고는 그 동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인정과도 비슷하다. 그런 사람이 “철학자”라고 하는 것인데, 평범한 사람은 벗어나지 못하지만, 특별한 어떤 사람이 “영감”이 (스스로?) 넘쳐서 자신 안, 물질 안, 그림자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참된 실재(reality)로서의 영원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4단7정 논쟁이 있었던 유교 자체 내에서는 “4단7정”이라는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은 가능 했었을런지 몰라도, “왜” 4단이 7정이 되는가 하는 근원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유교적 틀 자체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독교의 복음의 틀을 전승 받은 루이스인데도, 그런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Mere Christianity에서 이런 보편적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그 이상을 나가지 못한다. 왜 그런 도덕법을 인간이 달성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책들이 강조되고 있는, 알파코스 같은 프로그램들이 결국은 “이빨 빠진 복음”(Teethless Gospel)으로 불려지는 것도 어쩌면 이런 루이스 신학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2) 이방세계에서 개진되어진 선한 소원들 : 신화
위에서 언급한 플라톤의 비유에 나오는 동굴 속의 사람들에게 얼른거리는 동굴 벽의 그림자, 곧 이상세계의 흔적이 바로 루이스에게서는 신화이다.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선한 꿈”은 곧 이상세계의 반영으로서의 꿈인 것이다. 루이스는 실로 유럽의 신화들에 대해서 굉장한 매력을 느낀다. 그의 친구인 톨킨(“반지의 제왕”저자)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런 지식들은 심화되어진다. 그의 소설이 환타지 소설에 분류되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루이스는 의외로 “신화”에 긍정적인 기능을 부여한다. 이방종교의 신화는 “거짓된 것”이 아니고 “미완성의 것”이다. 기독교는 “완성된” 신화가 되는 것이다. 그의 소설 The Pilgrim’s Regress를 보면, 이들 이방종교의 신화들도 반쪽 계시를 담지하고 있는 아주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선택된 유대인들(The Shepahrd)의 계시도 반쪽일 뿐이다. 두 개가 합해져야만 온전한 계시가 된다는 것이 루이스의 견해이다.
이런 “신화”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로 인해서 “예수는 신화 중에 신화요, 참된 신화”라는 그의 견해가 나오게 된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신화”란 일반적인 용례로 사용되는 “거짓에 근거한” 이야기란 뜻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루이스의 모든 주장들을 오해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화는 거짓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근거하고, 실재에 근거한 것인데, 그것을 단지 “희미하게” 반영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화들 간의 차이는 단지 이 “희미함의 정도”간의 차이이다. 그 중에 가장 희미하지 않은 것이, 가장 실재에 가까운 것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방종교의 “신화”는 일종의 “형식”이다. 그 형식에 담고 있는 “내용”이 곧 “진리”라고 한다. 모든 종교가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신화중의 신화”인 기독교의 진리가 없이는 그래도 구원이 없다. 이런 구분을 하기 때문에, 그래도 루이스는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안도감을 준다. 타종교에 대한 공박도 없기 때문에, 비판을 해도, 너무나 부드럽게, 섬세하게, 어루만져 주기 때문에, 그래서, 인기가 있는 것이다. 자존심 상하게 하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3) 성육신한 그리스도
앞에서 필자는 루이스의 그리스도는 플라톤철학의 Demeriuge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신과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이다. 물질은 천하기 때문에, 정신이 직접 물질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바로 이런 중간적인 존재를 통해서 정신세계가 물질세계로 유출되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는, 루이스에게 있어서, 이방종교의 불완전한 신화의 계시와, 유대종교의 불완전한 율법과 규칙들의 계시가 완전히 충분하게 계시된 것이다. 바벨론 신화에 나오는 죽어가는 신의 불완전한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어감을 통해서 완전해 져서 참된 신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신화의 애매모호함과 희미함이 제거되어지고 이제는 하나님이 역사적 실재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주 정통적인 믿음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영적인 세계로부터 물질적인 세계로의 전이<transposition>와 초자연주의적인 플라톤철학의 핵심구조가 여기서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표현은 정통적이다. 하지만, 성육신 이해의 골간이 되는 그 구조는 플라톤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곧, 그의 성육신은 정통적인 신조와 고백들이 표현해 온, 위격간의 통일(hypostatic union), 인간의 육신(살과 피)과 신성(하나님되심)을 취하시게 되는 것(assumption)등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신성 속으로 삼키워져 버리고 그 인간본성이 신성화되어져 버렸다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기 보다는, 피조물이 완전한 전이를 통해서 순수한 영혼이 되었다고나 해야 할까? 예수는 우리와 똑같다고 하는 의미로서의 인간이 되었다기 보다는, 물질성을 취하여서 그것을 더 놓은 상위의 실제세계로 전이시킴으로 인간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의 참 인간이 아니고 그래서 신적인 존재가 된 인간(divinized man)인 셈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가 동정녀 출생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든지, 십자가 사건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는 것이 아니다(그의 구속이론은 좀 이상치만). 하지만, 그의 예수에 대한 묘사와 표현들을 음미해 보면, 그는 참된 육체(살과 피)를 가지고 있는 God-man이라기 보다는 잠시 인간세계를 방문해서 일시적으로 인간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님이 된 그런 존재이다. 그리스신화에서 등장하는 제우스신이 백조로 현현했다가 다시 제우스신으로 되돌아가는 등의 “신화”의 한 종류라고나 할까? 물론, “신화중의 신화”요, “참신화”라고는 하지만….별로 그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감이다.
이런 염려가 단순히 기우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아동들에게 보낸 어떤 편지에 의하면, 하나님은 다른 세계들(worlds, 복수임에 유의할 것)에 또 다른 몸들(bodies)가 있음을 믿는다고 하였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Of course there is one thing Aslan has that Jesus has not – I mean the body of a lion. (But remember, if there are other worlds and they need to be saved and Christ were to save them as he would – he may really have taken all sorts of bodies in there which we don’t know about.)’ 물론, 가정법이긴 하지만, 이런 가정법이 가능한 그의 사고 구조를 필자는 지금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그 외계인을 위해서 과연 예수가 십자가를 다시 지고선 죽으시게 될 것인가? 이런 질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다. 루이스의 어린아이들에게 던진 얘기는 바로 이런 질문에 예수가 다시 죽을 수 있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의 효력에 관한 신학적 의미는 상당히 곡해될 가능성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에 조그만 한 점 같은 이 땅 위에서의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과연 이 광대한 우주를 회복시키기에 충분한 죽음이었는가? 다른 우주에 있을 지도 모를 그 생물들을 위해서 예수는 다시 죽어야만 할 것인가?
답해 보기를 바란다.
4). 정리 및 결론
C.S.Lewis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 또한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영적 거인이고 또한 지성적 거인이다. 그렇지만, 나는 난장이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인 측면에서나 지성적인 면에서나. 그런 면에서, 이런 루이스의 신학사상에 대한 비평이 적절한 것일까? 제대로 평가한 것일까? 어쩜 신학자의 글도 아닌 것을 두고, 신학의 잣대를 댄 것이 너무 잔혹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줍잖은 신학으로 루이스의 신학을 곡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급한 마음으로 루이스의 신학을 스케취 하느라고 생략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힌트만 주고 넘어간 부분들도 있다. 어쩌면 이런 글로 인해서 그런 의문들이 더 많이 생기고 그의 글을 더욱 구체적으로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란다. 읽어보는 가운데, 더 많은 질문이 생길 수도 있고, 스스로 그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루이스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 최고이다. 그러면서도 자부해 보는 것은, 루이스의 글에 대해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칭찬일조인 세간의 경향에 이런 비판의 소리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루이스의 글의 또 다른 면을 볼 수도 있게 할 것이니까.
[출처]CS 루이스(Lewis)의 심각한 문제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