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예배”에 대한 논쟁이 한창인 가운데, 이제 “인터넷 성찬”에 대한 논쟁까지 발전하고 있다. 이 글은 성경적 원리와 신학적 원리에서 봤을 때에 “인터넷 성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터넷 성찬”은 그러한 “인터넷 예배” 도중에 인터넷 방송에 나오는 목사의 지도를 따라 성찬을 각 가정별로 혹은 개인별로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인터넷 예배”는 코로나 19로 인해서 한시적으로 허용된 가슴 아픈 “타협”(compromise)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터넷 예배”가 허용된다고 해서 “인터넷 성찬”까지 허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들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2. 성경적 근거
2.1. 핵심 구절(locus classicus)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찬식에서 읽는 성경 구절이 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이 구절들에서 알게 되는 성찬의 기본적인 원리는 아래와 같다.
2.2.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다(23-26절).
먼저,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라는 것이다.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헬라어, “파라디도미”) 성찬은 자신이 임의로 만들어서 전해 준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헬라어, “파라람바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들 “파라람바노”와 “파라디도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소급되는 진리(앎)와 행위(삶)의 수납과 계승을 뜻한다.
기독교회는 니케아신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 공교회”를 믿음으로 고백한다. 여기에서 교회의 단일성, 거룩성, 사도성, 보편성이라는 4대 속성이 나온다. 그 중에서 사도성이야말로 다른 모든 속성을 근거시켜 주는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사도성에서부터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이 나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도성은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것을 그대로 받아 행할 때에 확보된다.
우리가 왜 성찬을 행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2:19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을 행하여 그리스도를 기념하라고 직접 명하셨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고,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따라 행해야 한다. 목사 개인이 혹은 개체교회가 성찬의 형식이나 방법에 대해서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1645년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는 “주님의 만찬인 성찬 성례는 자주 거행되어야 한다. 거행 횟수는 목사와 각 교회 지도자들이 숙고하여 결정하도록 하며 목사들은 자신에게 위탁된 성도를 위로하고 교육하기에 가장 편리한 때를 찾아야 한다. 오전 예배 때 성찬 성례를 거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적고 있다. 그렇기에 “성찬 거행 횟수”는 가급적 자주 하는 선에서, 개별교회 당회가 결정하면 된다.
하지만 “성찬의 방식”은 개별교회가 임의로 정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해서는 교단에서 “예배지침”으로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고신교단의 경우 “예배지침” 제 5장 19조 31문에서, “성례전은 누가 집례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 다음, “성례는 사적으로 개인적인 장소에서 행해져서는 안 되며, 공예배 때 집행하고 사람들이 가장 편하게 듣고 볼 수 있는 회중들 앞에서 하나님의 청지기로 부름 받아 합법적으로 안수 받은 목사가 수행해야만 합니다.”라고 정해 놓았다.
우리는 다 주님의 식탁에 초청 받은 손님들이며, 목사는 그 식탁에서 수종드는 종들이다. 수종드는 자가 어찌 임의대로 식탁을 주관할 수 있으며, 손님이 어찌 주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음대로 식물을 먹을 수 있겠는가?
2.3. 성찬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새 언약의 공동식사이다(23-25절).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식사 도중에 성찬식을 제정하셨다. 성찬은 로마 가톨릭에서 잘못 가르치는 것처럼 “제사”가 결코 아니다. 성찬은 “새 언약의 공동식사”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공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 공동의 식사 교제를 하고 성찬을 행하였다. 그러다보니 애찬과 성찬이 함께 섞여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말씀 예배와 성찬 예배를 분리하기도 했다. 교회사가들은 2세기쯤에 성찬 시행이 애찬과 분리되었고, 동시에 말씀의 예배와 성찬이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추정한다(P. Drews, “Eucharistie,” in PRE, 3rd ed. V:562).
물론 성찬은 단순한 공동식사 이상의 의미가 있다(티슬턴, 『고린도전서』, 323). 공동의 식사라면 어느 개인의 집에서 행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성찬은 “교회에서 행하는 공동의 식사” 가운데 행해지는 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집”과 “하나님의 교회”를 대비시킨다(고전 11:22).
이것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이 성찬은 “새 언약의 식사”라는 사실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대비된다. “옛 언약”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식사를 “가족 단위로” 진행하였다(출 12:21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그것은 “가족이 행하는 제사”였다(출 12:27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하지만 “새 언약” 하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모인다. 교회 회원 전체가 하나의 가족이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로 모여서 함께 새 언약의 공동식사인 성찬에 참여한다.
2.4. 성찬은 공예배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33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일 때에”라는 표현을 쓰며, 34절에서는 “모임”이라는 표현을 쓴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33절에서는 동사(“모일”), 34절에서는 명사(“모임”)로 각각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는 모두 동사 형태인 “쉰에르코마이”이다. 17절에서 “모임”이라고 번역된 단어와 18절에서 “모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도 역시 “쉰에르코마이”이다.
성경 사전들은 이 단어가 ‘예배드리기 위해 회중이 모이는 것을 표현하는 사도 바울의 특수 용어’라고 설명한다(EDNT; TDNT). 바울은 이 단락을 여는 구절들인 17-18절과 닫는 구절들인 33-34절에서 “쉰에르코마이”라는 단어를 무려 4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성찬의 문제는 “예배를 위해 모인 교회”의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다(“어휘적 일관성”[lexical coherence] 기법).
18절과 22절에서도 바울은 “교회”(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하여 자신이 다루는 이 성찬이란 주제는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성찬은 공예배를 위해 모인 교회의 회원이 다 함께 참여하는 성례이다. 여기에서 “공예배를 위해 모인다.”는 구절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성찬이 “공예배”가 아닌 다른 모임에서 행해지는 것은 부적절함을 뜻함과 동시에, 성찬이 “모이지 않은 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 역시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예외적인 사항들(“환자들과 고립된 자들을 위한 사적 성찬”의 문제)은 아래에서 교회사적 근거를 살필 때에 다루도록 하겠다.
우병훈 교수
(고신대 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