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좌우명이 되는 말씀 / 챨스 스펄젼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이사야 7:4)
우리는 본문 4절 말씀에서 새롭게 맞은 일년을 어떤 좌우명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1. 우선 본문에는 우리로 하여금 경계(警戒)를 당부하는 “삼가며”라는 말씀이 있다(4절). 이사야는 철로가 부서진 줄도 모르고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정지(停止)를 명령하듯이 우리에게 본문 말씀을 명하고 있다.
즉, 짙은 안개가 낀 밤길에 기차가 잘 달릴 수 있도록 빨간 불로 신호를 하거나 폭병 신호기로 유도하듯이, 이사야는 우리의 허둥대는 발걸음이 실족하지 않도록 천천히 나아오라고 명한다. 이사야는 “삼가라, 여러분은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분주히 예비하고 있으며,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사야는 우리가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준비와 계획들이 모두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나아가라. 즉 발을 떼기 전에 살펴보고,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라. 몇 번이나 생각하고 또 기도하기 전에 어떤 일도 행하지 말라.“ 이 말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닌가? 삼가라! 맹목적으로 덤벼들지 말고 인도받기를 기다리며 여러분의 손을 하나님께 내어 밀라.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삼가라! 오늘날, 교회는 점차로 세속주의로 물들어 가고 있으며, 이 세속주의라는 송곳이는 교회의 목을 짓깨물고 있다. 교회의 모든 가르침은 거짓 가르침을 제외하고는 거의 도외시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약이 든 물을 마지지 않도록 삼가며,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양떼들이여, 삼가라!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너무도 바쁘기 때문에 세세한 것에는 정작 신경을 쓰지 못한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분 스스로가 이것저것을 주의해야 한다.
주일학교 교사들이여!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거나 가르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도록 ‘삼가라’. 그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아이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라.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로만 고백하는 사람들이여, 삼가라! 여러분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똑바로 보고, 나아가야 할 길을 깊게 생각하라.
2. ‘경계’의 말씀이 있은 후, 이사야 선지자는 잠잠할 것을 명하였다. “종용하라”(4절). 이 세상을 조용히 살아나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여러분을 향해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공격해 들어올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럴 때에는 꼼짝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 오히려 맞서 싸우는 편이 더 쉬운 일이다. 압박과 고간의 때를 맞아서 ‘침착함’보다 더 잘 우리의 거룩한 신앙을 영예롭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에 아마 세상 사람들은 "아니, 나라고 그런 때에 참착하지 못할 것 같애?“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놀라운 평정(平靜)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모든 문제의 열쇠가 되시는 하나님께 있다. 때문에 마음 안에 하나님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이 언제나 변함없는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3. 더 나아가 이사야는 ‘두려워 말라’고 말하였다. 지금까지 이사야는 외적인 태도와 행동에 대해서만 말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적인 감정(感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두려움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것임을 알고 있는가? 지금까지 병에 의해 죽음을 당했던 사람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두려움 때문에 죽어갔고 또 죽어갈 것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소망들이 대부분은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소망들이 사그라져야 할 어떤 실제적인 이유가 있어서 아니라, 소망을 품는 순간부터 그것들이 사그라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가진 높은 포부들은 대부분이 무위(無爲)로 돌아가곤 하는데 그 이유는 그 포부들이 달성될 것을 굳게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랴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성시켜 주실 것임을 굳게 믿으라. 우리는 각자가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신중히 다루되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된다. 과감히 떨쳐버려야 하는 것이다.
본문 4절에 우리의 힘을 북돋아 주는 말이 있다.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활활 타는 커다란 부지깽이와 같이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미 그것들에게서 연기가 나지 않느냐? 그것들은 다만 부지깽이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조금만 참으면 너는 이 고통의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다주시고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업이 성공하게 해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조”(14절)를 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그 징조가 없어도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징조를 주시겠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하스는 거절했었다. 그는 갑자기 멈추어 서서 “나는 구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12절)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징조를 주신다고 하셨을 때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단히 불경스러운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훌륭한 징조를 주셨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14절.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이 땅에 오셨다. 아니, 그분은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만일 너희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불신앙을 흰 악마(white devil)라고 부르곤 하였다. 우리는 그 흰 악마가 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