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차이점은 실제적으로 자주 나타난다.
이에 대한 보기를 두 가지 들겠다. 그 첫 번째 예는 화란 개혁교회의 캄펜 신학교 교수와 관련된 것이다. 그분은 Youth For Christ의 리더 모임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여러분의 운동에 반대하는 것은 여러분이 교회가 무엇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여러분의 단체에서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무시되고 있다는 것도 있다."
그들은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때 그들은 싱긋 웃었다. 그들이 성경 본문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지금 바울에게 싱긋 웃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오한 성경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내용과 분리된 것이다. 내가 성경에 나오는 것 중 하나를 언급할 때 여러분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을 고백하지만 그 다음으로 이 무오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무오성을 고백하는 것도 소용없다. 성경의 무오성을 고백하는 것은 그 성경이 내용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표현할 때만이 유익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서로가 동의하는 것이 아닌 성경 자체가 말하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위치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성경적인 교리라면 다른 단체들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활방식에서는 인정되어야 한다.
또 하나 예는 복음주의적 운동에서 나온 복음 송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즐겨 부르는데 구약의 이스라엘이 부르는 찬송 곧 시편과 비교해보면 오늘의 복음송과는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복음송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소재가 많다. 성경 시편에도 그런 노래가 있다(시146:8).
하지만 복음송의 소재로서는 적절치 않은지 성경 시편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싸우는 자(시35:2,3 ; 76편), 노를 발하시는 분(시78:21,31), 벌을 주시는 분 (시80:5,6,12) 또 인간이 두려워해야 할 분(시34:8,10; 90:7-12)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사랑만을 찬송하는 자는 표면적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접근할 때 신중해야 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방법으로만 하나님께 다가가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사랑과 나란히 하나님의 진노도 고백한다(II,I). 이 고백을 복음주의에서는 곧잘 무시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신앙생활이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개혁주의가 더 지성적이고 복음주의가 더 감정적이라는데 있는가? 그것은 실제로 사실이 아님이 분명하다. 복음주의에서 창조론을 말하는 학자들은 그것에 대해 지성적으로 많이 말하고 있다. 또 개혁주의자들 중 감정적으로 믿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많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지성이나 감정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차이는 성경의 완전한 내용을 고백하고 옹호하느냐 아니면 성경의 진리 중 좋아하는 부분만을 강조하고 고백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때 개혁주의는 성경의 내용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내용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고백하고자 한다. 복음주의는 그들의 관심이나 서로가 동의하는 부분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만을 강력하게 가르치고 옹호한다. 이처럼 복음주의는 성경의 내용을 많이 잘라낸다.
개혁주의는 가능한 한 복음주의의 좋은 점을 인정한다. 그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과 성경의 윤리를 지키는 것 등이다. 거기서 우리는 같은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를 따라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리의 후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재수 : 화란 개혁교회에서 한국에 교육선교사로 파송, 고신대학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