ꊱ 하나님이 직통 계시를 통해 성도하신다는 생각은 부흥에 가장 큰 해가 된다.
영감 혹은 직접 계시를 통해 이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무엇을 하는 것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지를 자신들에게 알려주신다는 생각은 가장 해로운 것이다. 교회 내에 이러한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되면 사탄은 하나님 백성의 안내자요 신탁자로서 자신을 부각시키고 자신의 말을 그들의 무오한 규범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그 결과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만들고 결국은 거의 쓸데없는 책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하늘의 직접적인 계시에 따라 인도받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는 자신의 모든 잘못된 처신에 있어 교정 불능 그리고 난공불락이 되어 버린다. 선량하고 신앙적인 많은 사람이 이런 인식에 사로잡히곤 했지만, 그러나 역사를 보면 직통계시는 모두 잘못된 것으로 판명나고 말았다. 목회 사역에 필요한 기술은 직접 계시가 아니라 배움과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존 에드워즈는 말한다(슥13:5).
성경 본문에 대한 충동적인 이해는 성령의 조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령의 조명은 어떤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시 없이 성경에 기록된 이미 주어진 계시를 적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롬8:14와 갈5:·18에 언급된 성령의 인도는 충동적인 성령의 인도와 관계없다. 성령의 인도는 은혜로운 인도 혹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하는 탁월한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생기에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룩한 천국을 소망케 함으로써 그들을 소생시키시고 그들로 하여금 진리와 기독교적 성결의 빛 된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탁월한 일들에 마음이 기울어지게 한다. 그리고 성도들의 눈을 단일하고 순수하게 만듦으로써 그들의 의무에 대해 그들을 조명하신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는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을 깨닫게 한다.
기도와 설교에 있어 초자연적 영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기도와 설교에 있어 성령의 은혜롭고 탁월하며 친절한 도우심은 내가 이해하도록 말씀을 직접 주시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뜨겁게 하여 말씀하실 일들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과 거룩한 감정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 그 깨달음으로 말씀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참으로 우리에게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말씀을 제시함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설교자들이 말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은 마음을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에 그 결과 우리의 입술은 충만하게 된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있어 크게 감동되고 그들의 마음이 충만할 때에는 말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하게 되며 그 주제에 대해 유창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내적 충동을 직통 계시라 여기는 사람들은 마귀와 자기 상상력에 속을 위험이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
ꊲ 믿음의 기도와 응답에 대한 오해
에드워즈는 믿음으로 기도했다고 해서 너무 많은 것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진실하고 뛰어난 많은 성도들이 실수와 올무에 빠지게 되는 것은 자신들이 믿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계시, 즉 성경에서 믿음의 기도에 대해 주신 약속들에 따라 우리는 추론해야 하지, 상상이나 감동이나 자기 의를 기초로 기도 응답을 확신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자비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비를 간절히 원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숙고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선한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되는지, 우리가 기도하면서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는지, 하나님의 충족하심을 얼마나 깨달았는지,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도움을 얻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겸손, 심령의 가난,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맡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 마음이 이런 상태로 충만할 때 특별한 자비를 위해 기도하면 놀랍게 응답받는 것을 에드워즈는 종종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ꊳ 성령이 주시는 욕구대로 모두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 오해
우리가 어떤 일에 하고자 하는 욕구가 간접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많은 것이 있다. 그 욕구가 일반적으로 선한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일 수 있으나, 특정한 행동들, 대상들 및 형편들에 따라, 그 욕구를 특별히 결행하는 것은 나쁠 수 있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 눈멂, 부주의, 망상이나 부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욕구가 전반적으로 허용되고 증진되어야 하지만, 그리고 단순히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은 모두 행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구가 어떤 다른 요인에서 비롯되어서 특별히 나쁜 방향이나 결심으로 나아간다면, 그 욕구대로 해서는 안 된다.
선한 성향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부주의나 망상을 통해 선한 성향에 정반대 될 일을 하도록 강력히 이끌 수 있다. 간접적으로 성령이 주신 욕구라고 할지라도 표출할 때는 절제가 필요하다. 바울은 고전 14:31-33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에게 (예언하고자 하는) 욕구가 간접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더라도 억제되어야 하며, 욕구를 표출하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대해 예언하는 자들의 분별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권한다.
ꊴ 미래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당장 눈앞에 유익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좋다는 오해
물론 그 자체로서 우리의 의무인 일들에 있어, 즉 도덕적 규칙들이나 혹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명령들이 요청할 때, 우리는 그 일을 해야만 하며 미래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 두어야 하지만, 그러나 다른 일들에서는 분별력이 받아야 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뱀 같이 지혜로워라고 말씀하셨다(마10:16). 성령이 복음 사역자의 일을 묘사할 때는 항상 지혜를, 미래의 사건들과 결과들을 현명하게 예견하고 대비를 필요로 하는 것에 발휘되어야 할 것으로 말씀한다. 목회자들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사도 바울처럼 가능한 불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을 피해야 한다(고전10:30-33, 9:19-23, 롬15:1-2, 14:19).
그리고 박해의 필요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불신자들을 잘못된 태도로 대하게 만든다.
새로운 것을 도입하고 낡은 것들을 철폐함에 있어서 우리는 사도들처럼 신중하고 온유해야 한다. 유대인의 안식일을 폐지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주일을 도입한 것도 아주 점진적이었다. 우리는 아주 생소한 것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도입하려고 할 때에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너무 무분별한 사람들은 열심 때문에 너무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고 만다. 우리는 범사에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ꊵ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오해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성공하게 하시는 것이 그 사람들과 그들이 취하는 모든 노선을 인정하신다는 의미는 아닐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이 주신 섭리적 성공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 말씀에 반대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와 커다란 명예를 오용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비난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때 성령의 특별한 위로를 받았다는 이유로 자기 행위가 모두 정당하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잘못이다.
섭리적 사건들, 우리 자신의 관찰과 경험, 인간의 역사, 믿음의 조상들과 신앙의 탁월한 사람들의 견해를 선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이 한 가지 기준, 즉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해야 한다. 말씀만을 우리의 유일한 기준으로 여겨야 한다.
ꊶ 외적 질서와 은혜의 수단을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생각
참된 경건이 외양에 있지 않다는 것이 외적 질서와 은혜의 수단을 무시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참된 경건이 먹과 종이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먹과 종이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못한다. 가시적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전12:14이하,롬12:4-8). 질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인 유익을 위한 모든 외적 수단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생각도 외적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다. 가정예배에 습관적으로 불참하는 것도 외적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다. 목회 교육을 받은 사람만 목회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도 외적 질서에 대한 무시이다. 비상한 체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목회 사역에 받아들이게 되면, 폭넓은 지식이 부족한 탓으로 종종 다른 사람들을 다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같은 때에 사람들이 빠질 위험에 있는 일들, 즉 충동, 헛된 상상, 미신, 무분별한 열심 그리고 그와 유사한 극단적인 일들로 인도하는데 적극적이 되기 때문이다.
ꊷ 목회자의 권위에 대한 오해
목사들은 자신들이 옛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와 똑같은 권위를 가진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비록 하나님이 목사들에게 커다란 명예를 주셨고 목사들은 하나님의 사신 자격으로 발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가 마지막 날 심판을 위해 오실 때 갖게 될 것과 똑같은 권위있는 외모와 위엄을 목사들에게 주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