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8-22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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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신학의 회복이란 칼빈주의로의 복귀를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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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고백 신학으로의 복귀의 당위성 기독 지성인이라면 지금이야 말로 정통신앙(正統信仰)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임을 절감할 것이다. 그런데 정통신앙의 회복을 위해서는 정통신학(正統神學)의 도움이 필요하다. 올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이라는 토대가 필요하고, 성경은 이 토대의 기반이 된다. 즉 신학과 성경은 동일한 진리 체계를 형성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해서 우리의 신앙이 올바른 모습을 취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드러내 보여준다. 이때 신학은 진리 표현에 있어서 성경과는 다소간 다른 형태를 취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성경의 계시 체계와 배치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다양한 표현 형태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정통신학의 출발점은 성경이고 또한 반드시 성경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신학’ 혹은 ‘성경의 신학’ 또는 ‘성경에 대한 객관적 신학’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지만 굳이 정통신학이란 말을 쓰는 데는 필수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교회가 시간의 역사 속에서 신학의 왜곡과 변질을 통하여 제 모습을 상실하는 불행한 과거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 왜곡과 변질의 신학과 과감히 맞서 싸우면서 본래의 성경 진리 체계를 회복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가리키려는 의도로 정통신학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결국 현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 앞에는 정통신학과 가짜신학이 놓여져 있다. 성경의 진리체계와 어긋나는 신학은 가짜이다. 이때 가짜신학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에 중점을 두는 인본주의 신앙 형태를 취한다는 데서 공통점을 드러내 보이며, 그러한 성격상 양적으로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이들 가짜신학에 의한 가짜신앙이 득세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신학의 회복, 곧 정통신앙의 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 안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지금 성경으로의 복귀를 주창하는 정통신학권 내에서조차 성경적 신학의 정체성 확립에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원론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정통신학의 회복이란 칼빈주의(Calvinism)로의 복귀를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칼빈이라는 사람을 우상처럼 받들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한결같이 진정한 경건, 곧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는 신앙으로 인도해준 신학자로서 자기 자신이 전개한 신학과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칼빈만큼 성경 사상에 확연했던 사람이 또 어디 있는가 하는 말이다.
사실 최근 들어 칼빈주의 신학의 정체성 확립이 겪는 혼란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신학자들이 늘고 있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하여 로마 카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확립한 신학 체계인 스콜라주의(Scholasticism)가 정통신학권 내에서 부흥(?)하는 현상을 우려의 눈빛으로 간파한다. 물론 개혁파 교회권 내에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하나의 발전 형태를 취해 나온 것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일은 아니다. 본래 칼빈의 성경적인 신앙과 신학 형태는 그가 그것의 건조성과 합리주의성 때문에 스콜라주의를 철저하게 외면했다는 데서 잘 나타났다. 그러기에 칼빈은 이후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의 원천 역할을 했던 자신의 걸작 기독교 강요를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 아닌 경건대전(Summa Pietatis)으로 호칭했던 것이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자기 시대의 개신교가 걸렸던 질병 중의 하나로 합리주의(rationalism)를 들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무서운 암적 요소인 신앙주의(believism)가 하나 더 끼어든 상황이다. 이 신앙주의는 이신칭의 교리를 오해한 합리주의와 인본주의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이러한 현상은 개혁파 스콜라주의 신학이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교리를 경건과 신앙으로써 대하기 보다는 합리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칼빈은 살아 있는 신앙과 경외심으로 예정론을 다루었지만 오늘날 현대 개혁파 스콜라주의자들은 이성과 논리를 앞세워 분석과 사변으로 일관한다.
그래서 전택설이니 후택설이니 하는 용어의 정립과 이에 대한 논리적 이해와 설명에만 집착하지, 실제적으로 이 예정론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는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루이스(C. S. Lewis)가 그의 명작 ‘순전한 기독교 신앙’에서 말한 바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Mere Christianity, p. 155.). “오늘날 새로운 것인 양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들의 상당수는 훌륭한 신학자들이 수세기 전에 이미 시험해보고 퇴짜놓았던(rejected) 것들이다. 그러므로 현대 영국에 유행하는 종교를 믿는 것은 퇴보(retrogression)이다.” 사실 신앙의 성향적인 측면에서 볼 때 루이스는 영국 성공회 소속의 신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보다도 복음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옛날 청교도 목회자였던 리챠드 박스터(Richard Baxter)를 존경했고, 그가 항상 강조했던 ‘순전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메시지를 좋아해서, 이렇게 자신의 작품명으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하면, 오늘날 기독교가 우려할만한 정도로 퇴보하고 있는 현상을 직시하고 대안을 찾되, 제대로 찾자는 것이다. 사실 겉으로 볼 때에는 기독교가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는 것 같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호기심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그들의 생각에 딱 들어맞는 새로운 것들이 부지기수로 나타난다. 무슨 무슨 부흥비법(그것이 무슨 비법이든 간에), 무슨 무슨 전도방법(그것이 무슨 방법이든 간에), 무슨 무슨 응답비결(그것이 무슨 비결이든 간에), 무슨 무슨 새로운 찬양(그것이 무슨 찬양이든 간에) 기타 등등이다. 교회 부흥의 새로운 비법과 비결을 가르쳐주겠다는 책들이 어디서 그렇게도 많이 쏟아져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통신학의 저울로 달아보면 대부분이 함량미달이요 오류투성이일 뿐이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혁파 정통신학권조차도 내부적으로 혼란에 빠져 있는 이 위기의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성경이 제시하는 신앙의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성경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려면 지금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변질된 정통신학’과 ‘실용주의 현상신학’이 아니라,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이 수립한 ‘경건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자체에 주목하는 일이요, 그것이 기반을 제공한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문서들로 돌아가는 길이다. 우리의 신앙 개혁은 ‘신앙고백적 신학’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실효적인 측면에서 우선적으로 붙잡아야 할 ‘하나되는 세 개의 신앙고백’ 두 쌍이 있다. 처음 한 쌍은 벨기에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 한 쌍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쌍의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은 개혁파 교회가 생명처럼 여긴 신학이요, 색채에 있어서 철저하게 칼빈주의적이며, 이 기반 위에서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이 두 쌍의 하나되는 세 개의 신앙고백은 오늘날 우리가 구현해야 할 실제적인 신앙의 모습과 방향을 제시함에 있어서 성경적으로 아주 정통적이며 매우 실효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공식화된 신앙고백은 성경해석의 지침 노릇을 하는 것이요, 개혁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신앙고백 학습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성경적으로 고백하면서 세워나가는 것이다. 사실 신학이라는 지침이 없이는 성경은 신자 개개인에게 너무 방대하고 복잡한 계시 체계이다.
게다가 오늘날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근거했다고 주장하지만,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이라고 하는 주연된 사상 체계와는 전혀 맞지 않는 주장들이 상대적으로 난무하고 있다. 따라서 반드시 신학의 도움이 필요하고, 이때 이 신학은 개인의 머리에서 나온 무슨 획기적인 학문적 결과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교회의 고백’을 통하여 성경적으로 인증된 것이어야 한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과 요리문답들의 중요성은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 신앙고백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종교적 환상이다. 교회의 검증을 받지 못한 신학, 곧 정통성을 상실한 머리만의 인본주의적 스콜라주의 신학은 시대마다 다양한 옷을 입고 나타나,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종교주의자들을 끊임없이 양산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 진정한 신앙체계인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교육들이 사라지고,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일찌감치 점검해 보고 퇴짜 놓았던 신앙형태들이 득세하는 데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 지성인들이여! 이제 이 혼돈의 시대에 한 순간도 주저 말고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돌아가자! 이 시대의 성도들이 성경 진리 체계에 일치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러한 삶을 실제로 살아내었던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생명과 연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승하라고 요구하는 개혁파 교회의 의무적인 유산임을 분명하게 깨닫자는 호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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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개혁신학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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