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표절이 왜 잘못인가?
첫째, 표절한 설교는 하나님의 현재적 메시지를 가로막는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시대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신적 메시지를 전했지만 그 배후에서 말씀하신 진정한 설교자(the only Preacher)는 하나님이셨다. 설교자 하나님은 교회 시대에는 목사를 통해 말씀하기를 원하신다. 주일마다 강단은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생생한 뜻과 음성을 전달하는 계시의 현장인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은 없이 베끼기만 한 원고를 들고 선다면 그보다 더한 잘못이 있겠는가? 바울 사도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preaching)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라고 했다(고전 2:4). 그 어떤 인간의 지혜로운 말보다도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재적 메시지를 그분의 백성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직무이다. 그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기 위해 설교자는 늘 두렵고 떨림으로 엎드려 묵상하며 말씀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 몸부림이 없이 ready made 된 인간의 말만을 들고 서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선생이 받을 더 큰 심판”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약 3:1 참조). 설교 표절은 윤리적 문제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가로막는 참람한 행위이다.
둘째, 설교 표절은 설교자의 영혼을 고사시키는 행위이다: 혹자는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만 있다면 표절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논문 표절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부도덕한 행위지만, 설교는 교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신학지식이나 지성이나 영성이 깊은 분들의 설교를 이용하는 것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것은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은 어떠해도 좋다는 상황윤리적인 궤변이다.
계속되는 설교 표절 행위는 결국 설교자의 영을 죽게 만든다. 위로부터 공급받는 말씀이 없이 남의 대문만을 기웃거리는 영적 걸인 같은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건강하고 충만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빈핍한 영성으로 어떻게 교인들을 먹이며 교회를 이끌 수 있겠는가? 상습적인 설교 표절은 양떼들의 목자로 세운 설교자의 영을 고사시켜 결국은 목사도 죽고 교인들도 죽게 만드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셋째, 설교 표절 행위는 교회를 병들게 한다: 베낀 설교라도 은혜롭기만 하면 교인들은 영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교회마다 회중의 특징과 그들이 처해 있는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 은혜로웠던 설교라고 해서 내 교회에서도 반드시 은혜로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경에 담겨있는 영원한 진리를 ‘지금 여기에’ 있는 청중에게 적실하게(relevant) 들려지도록 전파하는 것이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을 연구하는 것 못지않게 청중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 표절 설교는 청중을 완전 무시한 적실성 제로의 설교이므로 그런 설교에서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한 편의 설교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영성은 물론 그의 지성과 인품, 가정생활, 인간관계, 사회생활, 취미생활에 이르기까지 설교자의 전 삶이 영향을 미친다. 한 편의 설교 안에 설교자의 전 인격이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목사는 “지난 주 설교를 준비하는데 몇 시간이나 걸렸습니까?” 하는 질문에 “55년이 걸렸습니다.”라고 답했는데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표절 설교를 통해서는 그런 설교자의 전 인격적인 감화를 기대할 수 없다. 청중은 비 양심과 위선의 냄새를 맡을 뿐이다. 따라서 표절 설교는 교인들에게 일시적인 은혜를 끼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균형 잡힌 건강한 성장을 안겨줄 수는 없다.
작금에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중심에는 신뢰성의 붕괴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말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 충격파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밖에 없다. 수년 간 들었던 설교가 남의 것을 베낀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교인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보라. 결국 목회 현장은 황폐화되고 교회는 병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설교 표절이야말로 이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핵심 전략 중의 하나임을 인식하고 보다 엄중한 경각심을 가져야한다.
개선을 위한 제안들
설교 표절 문제는 목사 개인의 양식에 의존하는 개인 윤리의 성격이 강하므로 외부적인 제도나 환경의 변화로 개선될 수 있는 여지는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안들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 설교 작성에 관한 전반적 교육의 강화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신학의 꽃은 설교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중요성에 비해 한국 신학교들의 설교에 대한 교육은 빈약한 경우가 많다. 비전공자가 대충 가르친다거나 현장과는 동떨어진 지엽적인 이론 교육에 치우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본문 선택에서부터 주석과 아웃라인 작성, 그리고 전개의 전 과정을 스텝 별로 세밀하게 가르치는 실제적 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 든든한 기초도 없이 배출된 사역자들이 평생 남의 자료에 휘둘리며 살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또한 신학교 시절부터 설교 작성의 윤리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과제물을 작성에 있어 신학생들의 정직성은 일반 대학생들보다 하등 나은 것이 없다. 신학교 시절에 짜깁기 같은 비양심적인 행위에 익숙하게 된 학생들이 평생을 그와 유사한 유혹에 노출되어 살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미국의 대학들은 학생들이 학문적 정직성을 준수할 수 있도록 ‘명예규약(honor code)’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도 2010년부터 리포트를 제출할 때 표지의 ‘배움의 윤리 서약’에 서명하는 절차를 거치게 하고 있다. ‘배움의 윤리 서약’에 담긴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진환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