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을 중시한다는 말은 동시에 그 배경이 절대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말은 이성의 영역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놓아두시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영역에 다 절대적으로 지배하시는 분이시니까 이 세상에 자율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Autonomy라는 말이 자율이라는 말인데 auto는 자신이라는 것이고 nomy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법이 되는 것이 Autonomy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독립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나에게 새로운 법을 덮어씌울 수 없고 내가 나의 법이다라는 것이 자율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은 자율적이고 유명한 철학자 Kant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색을 자율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성의 특성은 autonomy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autonomy를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는 다 neitronomy, 타율이며 그 타(他)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 모든 영역이 다 하나님 권능 밑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일관성 있는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개혁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다른 모든 교회보다도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모든 시간에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지 않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3) 인간의 전적 부패
그 다음에, 그런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 가지고 성경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한 가지 개혁주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를 들면 인간의 전적 부패라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앞의 말과 직접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인간이 전적 부패했기 때문에 자기의 이성으로, 자기의 능력으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인간이 부패하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스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조금 남겨 두고 부패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두면 전혀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완전한 장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에게는 올바른 지식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구원의 능력도 구원의 길도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성경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인간에게 가르쳐 주시므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도 이 사상이 항상 전제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이 완전히 부패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의 의지조차도 항상 악만 추구한다면 로마서 3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만약에 계시가 아니 주어졌더라면 우리는 영원한 멸망 받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늘 잘 드는 예로서는 아브라함의 예가 있는데 인간적으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우선 애굽에 가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했는데 그 얼마나 비겁합니까. 좋게 말하면 얼마나 꾀가 많습니까. 그렇게 하면 자기 목숨은 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또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거라는데 나이는 다되어가고 아니 못 낳을 때가 다가오고 하나님이 약속은 했는데 이루어 주시지는 않고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느냐 하니 내가 한번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 보면 사람의 기대와 어긋난 방법으로 일을 이루신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런 것이 아주 꽉 차있습니다. 요한은 아주 고의적으로 그렇게 서술해 놓았습니다. 너희가 거듭나야 하리라 할 때 사람이 자기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하니 내가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의 생각과 다르다, 동에서 서가,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유명한 초대 교부이자 평신도 신학자로 유명한 터툴리안(Tertulian)은 “Credo absurdiban" 좀 의역을 하면 “나는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믿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내 이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나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믿을 가치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책을 잃었는데 그 안에 다 아는 내용만 있다면 그 책을 아주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가르쳐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가치한 책일 것입니다. 인간은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과 꼭 같은 성경이라면 역시 아무가치도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Augustinus)은 “I believe so that I understand", 내가 알기 위해서 믿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기 위해서 즉 내가 먼저 믿어야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서 믿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거기서 새로운 믿음의 지식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개혁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그것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느냐 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전적부패 때문에 성경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이 결국 다른 사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끝으로 이것과 관계해서 한마디 들릴 것은 오늘날 개혁주의 사상이 아주 맞는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상에서는 이성이 있다고 믿었고, 그 이성이 자율성을 갖고 진리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는데 현대 철학에 있어서는 이성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물론 루터가 ‘이성은 창녀와 같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그 당시 이성은 그 자체로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했는데, 루터는 이성은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 부자에게는 부자를 위해서, 우익의 이성은 우익을 위해, 좌익의 이성은 좌익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에 만인의 창녀라는 것입니다. 몇 세기 후 독일의 철학자 니이체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신막스주의자인 볼 카이브가 「도구적 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썼는데 오늘날 이성은 모두 도구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아득한 옛날 터툴리안이 주장했고, 어거스틴이 주장했고, 특별히 칼빈이 주장했고, 루터가 주장했던 것으로 우린 벌써 가만히 앉아서 옛날에 그 사실을 알았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개혁주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아주 현대적입니다. 모든 인간의 철학사상을 훨씬 앞선 사상입니다. 이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언지 아십니까? 그래서 요사이 철학자들은 이성이라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이성이 머리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했는데 x-ray가 발명되고 보니까 이성이라는 것이 있어야지요.
유태인 660만을 죽인 히틀러 이후로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지요. 과거에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었는데 현재 와서 보니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올바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장님과 같이 엉뚱한 데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당장 항의를 할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도 훌륭한 과학적 발명을 하고,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도 위대한 이야기를 하고, 소련에서도 인공위성을 띄우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 불교신자도 좋은 일 많이 하는데 어떻게 진리를 알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주의에서는 거기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반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완전히 죄악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그대로 두신다면 우리는 모두 멸망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은총을 주셔서 안 믿는 자나, 믿는 자나, 악한 자나, 의로운 자에게 다 골고루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것은 개혁주의에서는 일반은총이라 부르는데 모든 사람은 스스로 의식은 못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조금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로마 사람들이 그렇게 위대하게 만든 법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쓰고 있는데, 일반은총은 구원에 이르게는 못하지만 그러나 악이 극도에 달하는 것을 막아 주고 어느 정도의 진리를 간간이 소유하게 해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모든 진리-수학적 진리이든, 자연 과학적 진리이든-의 배경에는 진리의 영인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일반은총은 나중에 사람들에게 핑계하지 못할 무거운 책임으로 몰아갑니다.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부어 주셨는데도 하나님 대신에 썩어질 인간의 버러지와 금수의 형상으로 우상을 만들고 섬긴다고 로마서 1:12이하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손봉호 박사: 서울중앙교회를 다녔으며 장로로서 서울 영동교회에서 오랫동안 설교로 사역.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후 총신대학교에서 강의. 한국외국어대학교 화란어과, 철학과 교수와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고신대 교수. 동덕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