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엔
어떤 외국인이 쓴 책이 거의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었고, 이런저런 영향을 폭넓게 미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은 아주 굉장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40여권의 그의 책들은 2백만권 이상 전세계적으로 팔리고 있고, 지금까지 22개국 언어로 그의 책이 번역 되었다는 말을들으면 우리는 그가 광장하다는 우리의 확신을 상당히 굳게 할 것이다.
헨리 나우엔이 그런 놀라운 대접을 받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천주교회의 사제(priest)였고, 천주교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천주교적 사상을 토대로 한 ‘소위 영성 이론과 실천’을 제시했는데도 천주교인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개신교도들도 그의 글을 읽으면서 ‘소위 은혜’도 받고, 삶이 변했다고 하며, 그가 제안한 영성을 실천해 보려고 하고있다.
이것은 나우엔이 천주교회와 개신 교회 모두에게 영향을 미쳐서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한 어떤 사상과 어떤 ‘소위 영성’을 지녀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진실로 그러한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우리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성 작가”라고 언급되는 나우웬에게 접근해 보기로 하자.
나우엔, 그는 누구인가?
헨리 나우엔(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천주교 신부요 영적 생활에 대한 40여권의 책을 쓴 영적 생활의 저술가요, 그런 생활을 실천하려고 애쓴 사람이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정정을 그에 대한 우리 모두의 언어에 적용 시켜야한다. 그것은 사실 그의 이름은 앙리 나우윈(now-win)으로 발음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영향을 많이 끼치게 된 것은 그가 유명한 대학교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정신 지체자들을 돌보는 일에로 나아가 죽기까지 그렇게 낮아진 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 보려고 실천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단 그를 좀더 알아 보기로하자.
그는 1932년 1월 24일에 네덜란드의 네이께르크(Nijkerk)에서 세무법학자 였던 Laurent Jean Marie Nouwen과 Maria Huberta Helena Ramselaar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화란 사람이라는 것과 천주교인이라는 것을 배워 온 그는 6살 되었을 때 천주교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는 헤이그(Hague)의 제수이트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고, 그의 삼촌(Monsignor AC (Toon) Ramselaar)이 교장으로 있던 아펠도른(Apeldoorn)에 있는 작은 천주교 신학교 1년 공부하였고, Driebergen 근처의 Rijsenburg 신학교에서 6년 공부한 후, 1957년에 우트레흐트 교구에서 신부로 서품받았다. 나우윈은 목회를 잘 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교회의 허락을 받아서 네이메겐(Nijmegen) 천주교 대학교 대학원에서 1963년까지 6년 동안 심리학을 더 공부했다.
그 후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고든 알포트(Gordon Allport)의 격려와 추천으로 1964년에 그는 미국 캔사스(Kensas)주 토페카(Topeka)에 있는 메닝거 클리닉(Menninger Clinic), 종교와 심리 치료(Religion and Psychiatry) 프로그램에서 더 연구하고자 연구원(a fellow)으로 미국에 가게된다. 여기서 그는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 시워드 힐트너(Sewart Hiltner)도 있었다. 나우윈은 자신의 책 창조적 목회에서 힐트너를 자신에게 “목회 신학 분야를 도입시켜 준 선생님이요 친구”라고 언급하고있다
그는 이때 민권 운동과 마틴 루터 킹의 활동을 보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과 자각을 각제되었다고들 생각한다.
여기서의 2년 동안의 임상 심리와 연구를 바탕으로하여 비슷한 작업을 화란에서 하려던 그는 메닝거 연구소에서 알게 된 죤 산토스(John Santos) 박사에 의해서 미국의 전통적 천주교 대학인 노트르담 대학교에 새로 시작된 심리학과에서 같이 가르쳐달라는 청빙을 받고 2년 동안 노트르담에서 가르쳤다(a visiting lecturer, 1966-68).
그 후 화란에 돌아온 그는 암스테르담 목회 연구소(Amsterdam Joint Pastoral Institute)에서와 그 후에는 우트레흐트 천주교 신학부(the Catholic Theological Institute of Utrecht)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우윈의 친밀함: 목회 심리학 논문들을 살펴본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의 학감(dean)이었던 콜린 윌리암스(Colin Williams)의 초청을 받았을 때 나우윈은 박사 학위논문을 쓸 것을 요구하지 말 것, 3년 후에는 종신 교수(tenure)가 되는 것을 허락할 것, 그리고 5년 후에는 정교수가 되도록 해 달라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책을 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조건을 요구하고 허락받은 후에 그 곳에서 10년 동안 목회 심리학과 목회학을 가르친다(1971-81). 이 가장 왕성한 활동 기간 동안 그 자신의 별명이 되다시피한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 등의 책을 쓰게된다.
또한 70년 대 후반 중남미의 정치적 신학적 상황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1981년 7월에 예일을 떠나서 볼리비아에 가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그 후에 페루의 리마에서 가난 한 사람들과 함께 살기도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같이 가진 해방 신학자 구스타보 쿠티에레즈(Gustavo Gutierrez)의 좋은 친구가 되기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선교사로서의 사역이 그의 소명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그는 1982년 미국으로 돌아와서 해방신학을 가르치도록 그를 초청한 하바드 대학교 신학부에 1년에 한 학기만 가르쳐도된다는 파트타임 교수직(a part-time professorship: Professor of Divinity and Horace De Y. Lentz Lecturer)을 제안하여, 한편으로는 하바드에서 가르치는 일과 한편으로는 남미의 실상을 미국에 알리는 역할을하였다(1983-1985).
그러나 이 때가 그에게는 매우 어려운 때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사제로서의 25년을 산후에 나는 가장 기도하지않고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면서 논쟁이되는 문제에 매달려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일어났을 때 나는 나 자신이 매우 어두운 곳에 살고 있음과 심리학에서 편리하게 “극도로 지침‘(burn out)이라고 부르는 영적인 죽음 상태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16)
그래서 그는 1985년에 하바드 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이전에도 두 번(1983년과 1984년에)가 보았던 프랑스 트로슬리(Trosly)에 있는 (Jean Vanier와 Pere Thomas가 창설한) 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그들을 돕는 이들의 공동체에 참여하여 생활하게 되었고(1985년 8월부터 1986년 8월까지), 1986년에 카나다 토론토 근처의 리치몬드 힐(Richmond Hill)에 있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L’Arche Daybreak)에서 목회를 담당하는 신부로 부름 받고17) 깊이 숙고하는 시간을 가지고 감독의 허락을 받은 후에 이 부름에 응하여 6명의 정신 지체 장애자들과 그들을 돕는 분들과 함께 그들의 목회자로 살기 시작하였고 이곳을 자신의 최종적 사역지로 여겼다.
또한 정신 지체 장애가 아주 심한 아담 아네트(Adam Arnett)를 날마다 돌보면서 나우윈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섬기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다 탕자의 비유에 대한 렘브란트의 다규멘타리를 촬영하러 러시아로 가는 길에 1996년 9월 21일 화란에서 갑자기 일어난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고,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카나다 온타리오(Ontario) 주의 킹 시티(King City)의 한 묘지(Sacred Heart Cemetery)에 묻혀졌다.
우리에게 앙리 나우윈은 무엇인가?
나우윈은 우리에게 이 시대의 천주교회의 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의 삶의 중심에는 천주교적 성례인 영성체가 있었다.
그는 늘 성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다시 제시하는 피 없는 제사로 드리기를 원하며, 그러나 우리의 심령과 존재의 모든 면에서 준비를 잘 갖추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여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m)가 이 시대 가운데서 어떤식으로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옳다면 종교 개혁은 잘못된 것이된다.
나우윈은 결국 그가 제시하는 것 배후에 있는 철저한 천주교 사상은 종교 개혁자들의 오직말씀만(Sola scriptura)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하는 것이 옳지않다고 하는 것이된다.
나우윈에게도 은혜는 항상 준비된 자들에게 그들의 준비의 공로를 인정하여 주어지는 것이며, 은혜 받은 이들이 행하는 것은 진정한 공로의 성격을지니는 것이다.
힌두 영적 교사인 엘라뜨 에아스바란(Elnath Easwaran)이 만트라 명상을 가르치는 책을 추천하는데서 이 책은 “나에게 상당한 것을 도와주었다”고 말하는데서 그의 보편주의적 성향이 더 나타난다.
선택을 말하면서 그는 우리가 선택 받았음을 느끼면 느낄수록, 다른 이들도 똑같이 귀함을(in their preciousness) 발견하게된다고 말하므로, 결국 그가 수사적으로 사용하는 ‘선택’이라는 말이 그저 고귀함을 뜻하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동성애자적 성향을 가지고있었고, 이것 때문에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가 소년일 때부터 의심이 있었으나,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그에게 심한 어려움을 주었던 이 문제 때문에 나우윈은 많이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에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독특한 소명이있다는 것을 말하며 그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물론 넓은 의미의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가 가르치는 영성, 그의 영적 인도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심각하게 의문시하게되는 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의 철저한 천주교적 사상과 소위 영성 추구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하며, 이시대에 좀더 성경에 충실하고, 말씀에 충실한 선생님들을 더 갈망하게 만든다.
이승구 교수, 합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