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라이어막허(F. Schleirmacher)
흔히들 슐라이어막허를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는 모라비안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개혁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도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학생 시절 그는 칸트철학과 계몽주의에 심취되었고,1790년 목사 안수 받은 후 당시 새로운 운동인 낭만주의에 매료되었었다.
당시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정, 상상력, 직관 등을 강조하였다. 그는 기존의정통 신학은 지식층에게는 전혀 호소력이 없다고 믿었고 그래서 좀더 그럴듯한 기독교를 만들려고 했다. 그는 처음엔 기독교 교리와 고백서에 관심을 가졌고, 기독론에 많은 관심을 두기도 했다. 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신학의 핵심인 “감정”의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슐라이어막허는 종교의 핵심이란 바로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기존의 정통 신학을 ‘위로부터’ 신학이라 한다면 당시 계몽주의적 신학은 ‘아래로부터’ 신학이라고할 수있다. 슐라이어막허는 정통주의 신학은 인간적 권위로 포장되었고 인간의 창조력과 자유를 질식시키고 교회의 교리를 하나님과 혼동시켰다고믿었다.
그는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 경험의 인간적 성찰이라고 정의하며 새로운 신학의 길을 개척했던 것이다. 즉, 교리가 아닌 종교적 경험이 신학의 진정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감정”이란 단순히 인간이 감성적으로 느끼는 정도를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깊이 있고 심오한 의식(conscious ness)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사고나 감정 이전(以前) 혹은 그 밑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의 핵심은 모든 유한한 것들이 무한한것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존재하며, 모든 일시적인 것들이 영원한것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 감정은 모든 인간안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이성이나 양심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이성은 과학을 낳고, 양심은도덕을 낳고, 감정은 종교를 낳는다’라는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러한 슐라이어막허의 주관적(subjective) 신학의 틀은 어떠한 주장들을 담고 있는가를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의 신학은“종교 다원주의”와 연결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와서 현대 신학자들과종교가들은 “종교 다원주의”가 무슨 새로운 것인양 법석을 떠는데 사실종교 다원주의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슐라이어막허의 신학에도 여실히나타나고 있다)
슐라이어막허는 모든 종교가 이러한‘절대 의존의 감정’을 각기 다른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어느 것도 거짓된 종교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 그는 기독교가 가장 발전된 종교라고 한다. 그는 기독교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앙으로 정의되는 ‘의존’의 종교라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를 깨닫는 의식이 바로 그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바로 개인의 주관적 의존 감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막허에게는 하나님이란 단지 종교적 “감정”을 인간과 함께 정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실재(reality)에게 주어지는 이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범신론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속성이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며, 우리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정수에 대해서는 말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슐라이어막허는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인간과 갖는 여러 다른 관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성부 하나님,그리스도, 성령은 삼위가 아니라 같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관에서는 어떤 초자연적인 것(기적, 하늘나라, 영적 세계, 천사, 악 등등)이부정된다. 하나님의 초월적 세계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세계(인간)와의관계에서만, 특히 “감정”에서 발견 된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막허에게는 경험 혹은 감정이 신학의 궁극적 기준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계시의 형태이다. 계시란 어떤 개념 혹은 문장으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모든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계시는 직접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왜냐면 받는자에 의해 한 번 걸러야 하는 것이계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계시는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다고 한다. 계시는 어떤 외부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내적으로 받아지지 않는 것은 결코 나에게 계시가 될 수없다고 한다. 이런차원에서 슐라이어막허는 성경을 기독교의 감정을 말로 표현한 인간의 작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인간
슐라이어막허에게 죄란 역사속에서 어떤 특정한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 세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 죄요, 종교적 감정에 반대되는 것이 죄라고 한다. 인간의 영생이나 영벌이 한 사람의 한 순간의 결정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은 터무니 없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처음 단계에서는 영적으로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생물학적 지적인 발달이 영적 도덕적 발달보다 빠르다고 한다. 이런 차이에서 죄가 생긴다고 한다. 그는 죄란 선을 사유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죄가 존재해도 인간의 근본적 선은 계속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스도
㈀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는 남 다른 ‘종교적 감정’(Geful)을 가졌었다고 한다. 비록 십자가상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은 성경의 교리에 중요하기는 해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아는데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 것을 알지 못해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구속이란그러한역사적,외형적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함. 그리고 예수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동시에 존재할 수없다고 한다.
㈁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단지 모델일뿐 아니라 사람이 필수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모습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안에 내재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은 그가 우리의 불완전한 상태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지 우리의 죄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고 함. 그는 말하기를 “구속자는 인간 본성이라는 정체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같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의 일정한 힘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구분된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은혜
구원의 섭리는 창조의 섭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왜냐면 창조의 섭리로부터 종교적 의식 (감정)이 가능함에서 현실로 옮겨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은혜란 단지 인간의 가능성의 발전이요 인간이 거절할 수도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베푸는 구속은 그리스도 가진 하나님-인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가
㈀ 이성적 자율성의 원리: 비록 슐라이어막허는 기독교를 자율적 이성에 근거를 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시를 부정하는 그의 신학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의존하고 있다.
㈁ 그는 기독교를 인간의 자율적 감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계시를 떠나서 인간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합리적인 모습과 합리적이 모습이 동시에 보인다.
㈂ 비록 그는 성경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성경이란 단지 기독교 초창기 문서로서 (전통)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 외 다른 권위를 두지 않는다.
㈃ 그의 신학에는 하나님/인간, 초월적/내재적 이원론이 나타난다. 하나님이란 우리가 정하는 어떤 존재라기 보다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나타나는 감정(Geful)에 발견된다고 한다. 이것은 범신론적 개념이다.
㈄ 그의 신학에는 주체/객체의 이원론도 나타난다. 그는 주관주의자(subjectivist)이다. 즉 그는 진리 자체 혹은 우리를 떠나서 나타나는 진리를 부정한다. 또한 역사적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안에 있는변화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주관주의자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신학은 그 후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그들은 구속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 그의 그리스도는 인간 성품에 내재해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이러한 개념은 칸트에게서 온 것이다.
㈆ 구속사는 단순히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옮겨감을 느끼는 종교적 감정의 발전 과정으로 해석된다.
㈇ 그의 신학은 우리(인간)를 떠나서는 하나님도 없고 진리도 없다고 가르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나 인간의 능력은 다를 바가 없다.
㈈ 그의 신학은 칸트의 경험적/선험적 세계 이원론에 깊이 근거하고 있다.
그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나타나는 감정(Gef hl)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범신론적 개념인 것이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추구하는 신비적 체험 개념이 슐라이어막허의 감정 개념에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신 혹은 하나님이란 인간이체험하는 실재 (reality)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또 다른문제는 그의 강한 주관주의이다. 어떤 객관적, 역사적 사건은 자신에게 체험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나오는 것이 된다. 자신과 관계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구원도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슐라이어막허를 비롯해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이러한 자율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적 사건들을 발생되지 않은 것으로 말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신앙에 불필요한 것 혹은 관계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자신과 관계되어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칸트의 현상적/본체적 세계의 이원론에 기인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본체적 세계는 우리가 알 수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관계되는 한도에서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슐라이어막허의 신학은 그 자신이 기존정통 신학을 믿지 못함을 인해 감정(Gef hl)과같은 여러 허구적 개념들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위'와 '아래'를 연결하기는커녕 아래에서 인간자율성을 중심으로 빙빙도는 소용돌이에 불과한 것이다.
정승원 교수 총신대
전 공 : 현대신학
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 (B.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이수(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