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존 칼빈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일련의 교리들이나 아니면 그의 잘 알려진 저서 <기독교 강요>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어야 한다: “존 칼빈이라는 이름을 들은 후에 사람들은 ‘목회자들이 따라야 할 본’에 대해 생각할까? 정말로 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본을 그의 삶과 사역에 남겨 두었는가?” 이 글에서 나는 그가 바로 그런 인물인 것을 주장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두 가지 근본적인 사실에 기초해서, 즉 그의 삶의 방식과 설교 방법에 기초해서 입증하려고 한다.
칼빈의 삶의 방식
만약 정말로 존 칼빈이 목회자들의 모본이라면, 그가 살았던 방식에 그런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에 있어 좋은 본이 되라고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알기에 (빌 4:9, 살전 1:7, 살후 3:9, 딤전 4:12, 벧전 5:3), 우리는 존 칼빈이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정말로 살았는지를 묻는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인생을 간략히 개관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우리가 본받을 가치가 있는 그의 삶의 구체적인 특징들 몇 가지를 조명함으로써 결론을 내려볼 것이다.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피카드리 지방의 노용에서 제라드 칼빈과 조안나 칼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법률가였고, 또한 로마 가톨릭 지역 성당의 행정관이었다. 그의 어머니 조안나는 다섯 아이를 가진 경건한 여인이었는데, 둘 째 아이가 바로 존 칼빈이었다. 존은 교회에서 자라났고, 훗날 그의 아버지는 그를 훗날 사제로 만들고 싶어했다. 존의 아버지 제라드는 또한 그의 아들이 좋은 교육을 받기를 원했는데, 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한 돈을 자기의 직업에서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존 칼빈의 어린 시절 학업에 대해 윌리엄 다우닝 (William Downing)은 이렇게 말한다: “칼빈은 그의 아버지 덕에 좋은 교육의 혜택을 받았고, 학식 있고 저명한 가문들과 교류하며 자랄 수 있었다. 비록 그는 평민 계급이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 동료, 동급생들은 귀족 가문이었다. 그는 개인 교습의 혜택을 누렸고, 학업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열의를 가진 총명한 학생임을 보여주었다.”
1528년 즈음에 칼빈은 법을 공부하러 오를랭 (Orleans)으로 옮겨갔다. 리드 (W. S. Reid)는 이렇게 기록한다: “비록 그는 파리대학에서 사제직을 위해 훈련 받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노용 성당의 주교와 사제들과의 논쟁으로 인해서 자신의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를 오를랭으로 보내 피에르 드 에트왈 (Pierre de Etoile) 밑에서 배우게 했다.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흐릿하고 비천한 상태에서 건져내셔서 복음의 전령이자 사역자라는 가장 영예로운 직분을 맡기셨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의 아버지는 내가 신학을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법률가라는 직업이 그 종사자들에게 부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깨닫자 아버지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셨다. 그래서 나는 철학을 배우는 일을 그만두고 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비록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라는 은밀한 고삐로 결국 나의 진로를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끄셨다.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예기치 못했던 회심을 통해 몇 년 동안이나 완고하게 굳어 있던 내 마음을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유순한 상태로 만드신 것이었다.
1536년 즈음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한 칼빈은 조용한 학자로서 살기 위해 독일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로마 제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를 통과하는 우회로를 택해야 했다 (이 제네바는 윌리엄 파렐 (William Farel)의 지도 아래 한달 여 전에 개신교주의로 넘어온 도시였다). 칼빈은 거기서 단지 하룻밤만 머물 생각이었지만, 이곳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가 1564년 5월27일 죽을 때까지 향후 23년간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해 머무르게 될 도시였다.
1564년 4월 25일 그가 죽기 대략 한달 전에 칼빈은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나, 존 칼빈, 제네바 교회의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자 여러 질병으로 인해 쇠약해져 있는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가 나 같은 불쌍한 피조물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 모든 죄와 약함 가운데 있는 나를 참으셨을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나의 일을 통해 그분을 섬기도록 그분의 은혜의 참여자로 나를 삼으셨다는 것이다. ... 나의 전 구원이 달려 있는 그분의 예정 외에는 내게 아무런 소망도 피난처도 없다는 이 믿음, 그분이 내게 주신 이 믿음 안에서 내가 살고 죽음을 나는 고백한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이 내게 주신 은혜를 껴안고, 모든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우리의 위대한 구속주의 피로서 나를 씻어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그래서 내가 그분의 얼굴을 뵈올 때 그분과 닮은 자로 보이기를 나는 겸손히 간구한다.”
이제 그가 우리를 위해 본을 보여주었던 세 가지 주된 특징들을 살펴볼 것이다.
(존 칼빈 - 사역자들의 모델 (2)에서 계속)
[1] 헤리티지 개혁교단(Heritage Reformed Congregations)에서 발행하는 공식 교단 매거진 The Banner of Sovereign Grace Truth 2018년 3-4월 호에 “John Calvin – a Model for Ministers”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 허락을 받고 게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