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선행
사람은 ‘의’에 따라 네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첫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
둘째,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고 성례에도 참여하나 명목상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셋째, 마음의 불법을 숨기고 외식하는 위선자가 있다.
넷째,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 ‘진정한 거룩함’에 이끌리는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종류는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창 6:3) 마음이 거짓되고(렘 17:9), 그 계획하는 바가 온통 악하며(창 8:21), 생각이 허무하고(시 94:11),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시 14:2), 두려워하지도 않는다.(시 36:1, 롬 3:18) 이들의 행실은 심히 악하여 음행과 우상숭배와 당 짓는 것과 투기를 일삼는다.(갈 5:19-21)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여러 재능들을 선물로 주셔서 덕스럽게 하시지만 그들의 부패한 마음으로부터 나온 행위는 모두 가증스러울 뿐이다.(기독교강요 제3권 14장 1-3항)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는 첫 번째 종류의 사람과 다르지 않다. 이들의 행위 역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실을 돌아보시고(렘 5:3) 참 믿음으로 순결한 영혼의 헌신을 받으시기 때문이다.(행 15:9) 거룩한 것에 기름이 묻으면 어찌 얼룩이 지지 않겠는가?(학 2:11-14)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외식하는 자와 그 행위를 의롭다 하시겠는가?(기독교강요 제3권 14장 7,8항)
하나님 앞에서 의(義)와 불의(不義)가 구별되는 것은 ‘행위의 법’이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 11:6)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이 없으면 선행도 죄로 변한다. “그리스도와의 교통이 없는 곳에 결단코 성화(聖化)는 없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값없이 우리를 부르셨듯이 그 부르심에 따라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함도 오직 그 분의 은혜로 말미암는다.(엡 2:10, 딤후 1:9)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롬 4:17)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셔서(고후 5:17) 선한 일을 행하게 하셨다. 온 천하의 모든 것이 다 그 분의 것이듯이(욥 41:11) 우리의 선행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을 행함은 불가능하니 그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
여호와께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사(호 2:19) 자신의 의로써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시면(사 59:15,16) 의인도 없을뿐더러 행위의 의도 없다. 오직 택하심을 받은 성도만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벧전 1:2) 이렇듯 ‘순종함’도 은혜의 선물이다.(기독교강요 제3권 14장 1-6항)
네 번째 종류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순결한 생활을 하며 마음을 다하여서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는 성도들도 여전한 육체의 연약함 가운데 계속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선만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 7:20, 왕상 8:46) 그러므로 계속해서 허물을 사함 받고 죄가 가려지는 복을 평생 받아야 한다.(시 32:1, 롬 4:7)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한 번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이제 자신의 선행의 공로로 상급을 받는다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궤변에 불과하다. 오직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만이 성도의 구원 전 과정에서 역사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영원한 중보자가 되심으로 그 분의 죽음이 영원한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즉 죄 씻음, 무름, 속죄 그리고 종국적으로 우리의 모든 불법을 가리는 완전한 순종을 실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음을 의(義)로 정하셨다.(롬 4:3) 믿음의 의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공로가 없다.(엡 2:8,9)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성도에 관하여서도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 ‘계명’을 헤아려야 한다. 율법의 가르침은 선하나 그것을 행함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제3권 14장 7-11항)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는 칭의와 성화에 모두 미친다. 양자를 분리하면 우리는 단지 ‘불구(不具)가 된 믿음’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칼빈의 롬 3:22 주석)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선행에는 의(義)를 얻기에 고유한 가치는 없지만 은혜를 받아들이는 공로(功勞)가 있다고 본다. 행위의 의는 완전하지 않으나 그 불완전함이 은혜를 받는 ‘잉여 행위’에 의해서 보충된다고 한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은혜’에 공로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전적인’ 은혜 아닌가?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진대 어떻게 갚고 남는 행위의 공로를 기대할 것인가?
우리가 먼저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우리를 받아들이는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에 이른다. 그러므로 굳이 행위의 보속(補贖)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편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편의 우리의 죄 값을 무름에 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행한 후에도 단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여야 한다.(눅 17:10) 우리가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다 행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해야 할 것을 행한 것에 불과하다. 하물며 그것의 일부를 불완전하게 순종하는데 그치는 지상의 삶 가운데서 어느 성도가 잉여 공로를 말할 것인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