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후에 숨은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그러나 이런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배후에는 성도들의 판단을 어렵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배후에 숨은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배후에 숨어 있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는 때로는 “고지론”(高地論)의 형태로 아주 의미 있는 듯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믿는 사람이 그래도 잘 되어야 복음 전도에 유익이 되며, 또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잘 되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지 않으시겠느냐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지론이란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든 노력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높은 곳을 차지하면 이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논의이다. 일단 믿는 사람들이 사회의 높은 곳을 차지해야 복음 전도가 잘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논의들은 대개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는 말씀 같은 것을 성경 전체의 빛에서 균형 있게 이해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아주 단순하고 기계적인 성경 해석에 근거하여 나타난다.
잠언서와 시편에 나타나고 있는 성도는 결국 잘된다는 큰 원칙의 선언을 성경 전체의 조망 없이 선언하고 성도들은 그것에 동의하면서 확대 재생산된 것이 “배후에 은밀하게 숨은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이다. 현재 우리들의 교회에 이런 은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아주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보다 배후에 숨은 이 은밀한 성공추구주의가 더 심각한 문제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게 된다. 이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대개 다음 같은 생각의 과정이 나타난다.
1.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려” 달라는 간구(시 3:8)의 성경 전체적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믿는 사람들과 교회는 이 세상적 의미의 복을 많이 받게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2. 따라서 다음 같은 말씀을 그 맥락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하려 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시 16:9).
3.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같은 말씀을 그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고 한다.
이러한 “배후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성경이 곳곳에서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 도다”(시 12:8) 또는 시편 73편과 같이 인생사의 복잡함과 애매모호함을 잘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하도록 한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탄식시의 본질,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을 열고 간절히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다음 같이 기도하는 그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한다: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편 13:4). 따라서 이런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는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그 말의 진정한 의미, 즉 이 세상에서 참으로 의지할 것이 없는 주의 백성의 모습을 이 말씀 속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주의 참 백성이 왜 이 땅에서 가난한 자와 곤고한 자로 언급되고 있는 지를(시 14:6, 시 18:27 등 참조)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일반화 되면 자신들이 믿는 바가 성경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개인의 행복과 교회의 번영과 교단의 힘을 자랑하는 일이 나타나게 된다. 아주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비판하는 보통의 한국 성도들 가운데 상당수, 심지어 목회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참된 신자들은 이런 의미의 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도 잘 되며, 그리하여 날로 생활이 윤택해지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는 날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그런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요 부흥하는 교회라는 생각을 하고, 따라서 그런 교회들이 많은 교단이 옳고 바르며 힘 있는 교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는 성도의 고난에 대한 이해도 그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부합하게 해석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아주 저질(低質)적인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잘못했기에 물질적으로 가난하며 세상에서 잘 되지 못한다고 까지 생각하고 말한다. 그 보다 나은 이해를 가진 사람들도 지금의 이 고난이 다 쌓여 후에는 자신이나 또는 그 자녀들에게 더 큰 물질적 축복과 세상적 복이 오게 된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죽음 후에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것도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성향을 나타낸다. 성경이 말하는 상급을 매우 물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도 이런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교회는 일반적으로 아주 철저하게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사로 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도 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해서조차도 이런 물질적 이해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을 현혹하는 “배후에 있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이다. 처음 생각한 “아주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이와 같이 배후에 있는 숨어 있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일종의 기초 자산을 제공하며, 전체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