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계몽주의 이후 자유주의신학이 등장한 이래 무신학적이고 반교리적인 교회가 기독교회의 주류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 자유주의신학에서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학도 교리도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못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신학자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신학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는 태도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는 이 시대정신과 아주 닮았다. 그러나 이런 신학 경시 태도 이면에는 사실 성경의 독점적 권위에 대한 부정이나 회의적 태도가 항상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근래 20년 동안 한국의 교회 안에서도 신학과 교리를 경시하는 풍조가 확산되어 왔다. 무엇이든지 교세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일반화되었다. 교회가 오순절적인 은사체험 프로그램을 채택하기도 하고, 만담식의 설교와 유희중심의 예배도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런 병리현상으로 인해 결국 교회는 근본부터 쇠하게 되었고 출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악화되면서 다시 이 시대의 풍조에서 해결책을 찾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바다에서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로 갈증을 달래는 식의 행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에는 결국 죽게 되어있다.
다른 무엇보다 한국의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와 “모든 성경”(scriptura Tota)의 신앙을 시급히 회복해야 한다. 선교초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서 신적인 책 그리고 권위 있는 책”이라는 철저한 성경관에 기초한 인물들이었다(간하배, 「한국장로교신학사상」 이들 대부분은 성경의 무오성을 철저히 믿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에 평양신학교를 세웠던 마포 삼열 선교사는 선교회와 한국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철저한 신앙과 열정적인 복음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간하배, 「한국장로교신학사상」
한국교회에서 성경관은 무오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고, 이 성경관이 독노회를 결성할 때 작성한 12신조의 제 1조에서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이라는 고백에 반영되고 있다. 미국장로교회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1900년대 초부터 미국 유니온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국 장로회 선교회 안에서 성경 무오성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공위량(William Kerr)이다. 그는 나중에 전통적인 한국 장로교 신학에 반기를 든 김장호의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몇몇 목사들과 학생들이 공위량의 입장에 동조했으나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한국교회사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은 김재준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그는 일본의 청산학원에서 수학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청산학원은 신학적으로 “급진적이었고 일종의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분교와 같았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자유주의신학에 물들었고 당시에 출간되었던 신정통주의 학자 칼 바르트의「로마서 주석」을 탐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당대의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였던 존 머레이 밑에서 수학하면서 자유주의와는 정반대의 근본주의 신학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김재준은 자신 만의 신학을 추구했는데, 그것은 성경이 인간의 저작물에 불과하다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배격하면서도 그렇다고 성경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인정하는 것도 아닌 것이었다. 즉 현대주의와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종합하고자 시도했다. 바로 그 결과로 도달한 것이 성경은 구원에 관해서는 무오하나 역사와 과학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성경의 무오성을 구원에 관한 내용만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그 나머지에 있어서는 역사적 과학적 오류가 있다는 점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이런 식의 유보적인 태도는 감리교의 유형기가 목사가 주도한 아빙돈 단권 주석 번역작업에 참여한 장로교의 김재준, 송찬근, 채필근, 한경직 목사 등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성경 말씀이 종교적 견지에서 진리라 하여 반듯이 자연고학, 역사, 고고학에 있어서도 절대 무오 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또한 그렇게 주장할 필요도 없다. 성경에 기록된 과학설은 성경이 씌여질 적에 유행되는 것이오, 성경에 있는 종교적 진리와 같이 영원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유형기편, 「단권성경주석」(서울: 신생사, 1935), p. 24.)
1940년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 등이 주축이 되어 마침내 평양 신학교와 신학적 단절을 선언하고, 성경 무오를 거부하는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그들은 1945년부터 정통신학과 성경 무오 및 축자영감을 더욱 공개적이고 과감하게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서 1947년 박윤선 목사를 비롯한 53인이 평양 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결국 성경의 무오성을 둘러싼 양대 진영의 격화된 대립은 결국 장로교가 예장과 기장이라는 두 교단으로 분열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된다. 장로교의 최초의 분열은 성경의 무오성을 둘러싼 신학적인 대립으로 인한 것이었다.
박혜근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2003년부터 칼빈대학교에서 12년간 조직신학을 가르쳐왔다. 미국에서는 필라델피아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