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주의에 대한 오늘날의 태도: 그 원인과 의미
오늘날 미국의 학문은 "독일의 것"이고, 미국의 문화는 대부분 영국에서 온다. 그런데 근래의 독일 학문은 슬프게도 합리주의적 경향을 띤다. 합리주의적 경향이 루터주의에 첨가되었고 기이한 모습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이와 유사하게 영국 문화는 그냥 침투했다기보다는 하나부터 열까지 영국 국교회의 색채로 얼룩져서 유입되었다.
루터주의는 칼뱅주의를 항상 관용하지는 않았다. 영국 국교회주의는 결코 칼뱅주의를 허용하지 않았다. 자연주의(Naturalism)는 정확하게 칼뱅주의와 모순된다. 그러므로 (학문적인 책이든 순수 문학적인 책이든) 자연주의 정서가 가득한 책에 심취한 사람들은 칼뱅주의에 숨 막혀 했다.
물론 이 문제의 다른 면도 있다. 오늘날 세계에는 전에 없이 많은 칼뱅주의자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칼뱅주의적 교회임을 고백하는 교회들도 비교적 그 지위를 잘 고수하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대 사상이 이런저런 칼뱅주의 개념들을 이용하려는 것은 중요한 경향이다. 무엇보다도 겸손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조용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위엄 가운데 하나님에 관한 통찰에 사로 잡혀 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칼뱅주의의 본질이기도 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려는 생명력 있는 불꽃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적인 면에서 이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즉 오늘날 사상의 경향을 고려해보면 칼뱅주의의 번영은 현재 최고치에 있지 않다. 킬뱅주의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가 칼뱅주의로부터 멀어졌다. 칼뱅주의를 여전히 형식적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말과 행동에서 칼뱅주의를 언제나 표현하거나 선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은혜의 선택에 따라 남은 사람이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은 사람들의 상태는 비교적 건강해서 그 안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씨앗의 형태로 미래의 성장을 위한 약속과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상태는 기뻐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남은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비우호적인 세력을 만난다. 남은 사람들은 의심하거나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변명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이 변명하는 태도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칼뱅주의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칼뱅주의는 그 힘을 잃고, 사람들과의 투쟁 속에서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나는 우리 시대 칼뱅주의의 상황을 너무 어둡게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분명히 믿는 바에 의하면 과거 칼뱅주의가 개신교적 기독교에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던 것처럼 칼뱅주의는 오늘날을 위한 힘이요 미래를 위한 희망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칼뱅주의는 너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우리가 이것을 어느 정도로 체감하느냐는 곧 칼뱅주의를 향한 태도의 원인과 의미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느냐를 말해준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칼뱅주의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되짚어보면서 시작해야 한다. 칼뱅주의는 다음 세 가지 명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 칼뱅주의는 정당한 권위를 회복한 유신론이다. (2) 칼뱅주의라는 개념의 정점에 경건이 있다. (3) 칼뱅주의는 가장 순전하고도 확고하게 표현된 개신교다.
(1) 칼뱅주의는 정당한 권위를 회복한 유신론이다. 유신론은 우주를 목적론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만 권위를 얻는다. 왜냐하면 이 땅이나 하늘에 (인간이 많은 것을 신이나 주인으로 섬기는 까닭에)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많지만, 유신론자에게는 만물을 지배하시고 만물의 목적이 되시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칼뱅주의자의 선언을 만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원인이다." 나는 여기에서 유신론과 칼뱅주의가 유사점을 지닌다거나 서로 밀접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둘이 동일하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따르면 유신론, 곧 참되고 변하지 않는 유신론이자 모든 유신론이 마땅히 되어야 할 그 유신론은 원칙적으로 이미 칼뱅주의다. 다시 말해서 칼뱅주의는우주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순전한 유신론과 다를 게 없다. 칼뱅주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바로 그 정도만큼 우주에 관한 참된 유신론적 개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과 같다. 물론 순전한 유신론으로부터 멀어지는 정도는 칼뱅주의로부터 멀어지는 정도와 같다. 불완전한 유신론이 우리의 세계관에 스멀스멀 들어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칼뱅주의는 불가능하게 된다.
(2) 칼뱅주의라는 개념의 정점에 경건이 있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 행하는 경건에 관련된 것들에(신비체험이라는 모호한 느낌, 무한한 존재에 이르기 위한 몸부림, 경외와 두려움을 깊이 느끼는 것, 책임을 민감하게 인식하거나 둔감하게 파악하는 것 등) 다른 어떤 것이 유입되더라도, 경건의 본질은 초월적인 존재(supreme Being)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가 절대 의존 감정이 지적 내용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처럼 절대 의존 감정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절대 의존 감정은 지적 내용을 가지지 않는다는 슐라이어마허의 말은 모순이다. 경건의 본질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을 의미하고 오직 이 절대적 의존 감정이 생각과 감정과 삶에 완전하고 충만할 때 칼뱅주의가 이야기하는 경건 개념의 정점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칼뱅주의를 만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 의존으로 이해되는, 경건에 관한 유신론적 표현이 바로 칼뱅주의가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이 순전하게 표현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칼뱅주의를 암시적으로 발견한다. 나는 칼뱅주의에 대해 크고 작은 정도로 접근하는 법을 그 지점에서 추적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칼뱅주의가 암시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순전한 경건은 삶에서의 칼뱅주의다. 우리가 칼뱅주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곧 경건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칼뱅주의로부터 멀어지는 만큼이나 순전한 경건으로부터도 멀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칼뱅주의라는 개념의 정점에 있는 경건으로부터 멀어지기란 너무 쉽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지성이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의 태도를 잠시 동안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 태도를 견지하고, 그 태도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은 어렵다. 기도할 때 우리 영혼이 지니는 태도, 바로 그것이 경건한 태도의 극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취했던 그 태도를 기도를 마친 후에도 유지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아멘!"과 함께 그 태도를 단숨에 끝내버리고 전혀 다른 마음으로 우리의 일상생활로 돌아가는가? 칼뱅주의는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의존, 즉 우리가 기도할 때 취했던 그 태도를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서 유지하는 것이다. 칼뱅주의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결정하는 경건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칼뱅주의는 그 개념의 정점에서 경건과 동일한 연장선에 있다. 경건이 어떤 정도에서든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우리의 내면적인 생각이 경건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 칼뱅주의는 불가능해진다.
벤자민 B. 워필드의 '칼뱅'에서 발췌
벤저민 B.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와 함께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887년부터 1921년까지 교수로 재직한 신학자